사회 전국

[디지털 증거 어떻게..] (2) "수사 편의만 주장하면 안돼" 판사들의 반론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5.12.10 17:23

수정 2015.12.10 22:11

"억울하게 감옥가는 사람 생길수도.."
"익명의 e메일 투서를 증거로 인정할 수는 없어.."
디지털 증거도 정해진 요건 갖추면 증거능력 인정
대부분의 판사들, 형사소송법 개정에 대해 회의적
[디지털 증거 어떻게..] (2) "수사 편의만 주장하면 안돼" 판사들의 반론

#. 살인 혐의로 법정에 선 A씨. 증거는 "내가 C를 죽였다"고 적힌 한글파일이었다. 검찰은 "적법한 압수수색을 통해 한글파일을 확보했다"며 "A의 말을 들은 친구 B가 파일을 저장했다"고 제시했다. A씨는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항변했지만 디지털조사관은 "과학수사를 통해 B가 작성한 것이 맞다는 게 입증됐다"고 증언했다. 그런데 정작 문서를 작성했다는 B씨는 해외에 있어 법정출석이 어려운 상황이다.

만약 fn독자들께서 이 사건의 판사라면 어떤 판단을 내리시겠습니까? 문제의 파일을 증거로 삼아 살인 혐의를 인정할 수 있을까요? 취재 결과 검사들은 '그렇다'고 말하지만 판사들은 '좀 더 살펴봐야 한다'는 신중한 입장입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판사들은 "논의는 필요하지만 성급히 결론짓는 것은 위험하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사진, 음성, 영상녹화물, e메일…. 어디까지 디지털 증거를 인정하느냐에 대해서도 판사들은 조심스러워했습니다.

■누가 쓴 투서인지 모르는데…?

한 판사에게 검사들의 푸념을 전했습니다. 앞서 1화에서 소개한 "디지털 시대에 맞춰 지나치게 엄격한 디지털 증거의 인정기준을 완화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자 그는 예를 들어가며 조목조목 구체적으로 반박을 해왔습니다.

이를테면 '모 대기업 사장이 회삿돈 100억원을 빼돌렸다'는 투서가 e메일로 수사기관에 접수됐다고 하죠. 그 회사의 사내메일 계정이 발신자이긴 한데 정확히 누구인지는 모릅니다. 그럴 경우 판사는 법정에 작성자(혹은 발신계정 소유자)를 불러 이것저것 사실관계를 물어야 합니다. 그런데 작성자 대신 디지털조사관이 나타나 "이 투서는 진실"이라며 확신에 찬 목소리를 높입니다. 피고인이 된 사장은 억울하지만 방법이 없습니다. 작성자가 나와야 따져 물을텐데 딴사람이 나왔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 경우 현재는 증거능력을 인정받기 어렵습니다. 판사의 판단대상에서 빠지는 거죠. 반대신문의 기회가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검찰은 이런 것까지 증거로 인정해달라는 겁니다. 판사들은 말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검사들은 좋겠지만 억울하게 감옥을 가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다'고 말입니다.

■'비디오 재판' 번지면 안 돼

일단 기자가 만난 판사 대부분은 법무부의 형사소송법 개정안에 회의적이었습니다.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을 보장하기 어렵고 하나의 법안으로 '원샷원킬'식으로 처리하기엔 디지털 증거 문제는 너무 방대하다는 겁니다. 또 다른 증거들의 인정기준과 균형도 맞춰야 한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종이문서에 비해 디지털 증거가 차별받는다는 것도 오해라고 말합니다. 디지털 증거도 문서 증거의 법리가 준용되기 때문에 정해진 요건만 갖추면 얼마든지 증거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고, 다른 우회기법도 있는데 검사들이 자신들의 편리함만 찾는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간첩사건에서 북한과 주고받은 e메일이 나왔는데 피고가 '내가 안썼다'고 오리발을 내밀면 내용을 가지고 유죄선고를 못하지만, e메일을 주고받았다는 사실만큼은 명백하니 이걸 간첩죄 유죄증거로 쓰면 된다는 거죠.

판사들은 "필요한 범위 내에서 디지털 증거를 인정하고 있는데 마치 법원에서 다 인정해주지 않는 것처럼 보는 건 과한 측면이 있다"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영상녹화물은 더 문제라고 합니다. 법정에서 피고인이나 증인의 이야기를 직접 듣지 않고 영상물만 죽 틀어놓는 '비디오 재판'이 될 것이라는 우려까지 나왔습니다. 또 증거로 쓰일 동영상을 확보하기 위해 자백을 강요(혹은 회유, 기망 등)하는 사례가 발생할 우려도 있다고 했습니다. 이 때문에 지난 2007년에도 영상녹화물을 증거에 포함시킬 것인지를 놓고 첨예한 논쟁을 벌이다 결국 빼는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전자정보 압수수색 요건 제시

물론 법원도 디지털 증거에 대한 판례를 꾸준히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올 7월 대법원은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대선개입 사건을 파기환송하면서 디지털 문서의 증거인정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같은 달 대법원은 다른 사건 판결에서 디지털 증거의 압수수색 요건도 제시했습니다.

이에 맞춰 서울중앙지법은 지난 8월부터 컴퓨터나 외장하드 등 전자매체 자체를 압수하는 것을 금지하고 전자정보만을 압수대상으로 하는 '전자정보 압수수색 영장에 관한 새로운 실무 운영'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더 엄격해졌습니다. "판사도 사람입니다.
증거의 세계에 들어올지 말지는 엄격히 따져야 합니다. 증거능력이 없는 자료도 한 번 접하게 되면 형량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라고 한 현직 판사는 말했습니다.


한편 대법원 법원행정처는 국회 요청에 따라 형사소송법 개정안에 대한 의견을 비공개로 제출한 상태입니다.

hiaram@fnnews.com 신아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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