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일반

[아메리칸 인디언을 찾아서] (8) 눈물의 강제이주, 1830년 '인디언 강제이주법'으로 삶의 터전 잃고 황무지로 쫓겨나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5.12.24 17:28

수정 2015.12.24 18:06

체로키족 끝까지 저항했지만 백인들 총칼로 위협하며 추방
추위·질병·배고픔 시달리며 강제이주 과정 4000여명 죽어
현재 3540㎞ '눈물의 길' 남아
'눈물의 길' 안내표지판
'눈물의 길' 안내표지판


[아메리칸 인디언을 찾아서] (8) 눈물의 강제이주, 1830년 '인디언 강제이주법'으로 삶의 터전 잃고 황무지로 쫓겨나

전쟁 영웅으로 이름을 날렸던 앤드루 잭슨이 1828년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인디언들은 혹독한 시련의 계절을 만나게 된다. 잭슨 재임 시절 미국은 인디언과 흑인을 희생양으로 삼아 영토 확장과 국력 증강에만 골몰하는 백인 정착민들의 전쟁국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조지아주가 체로키족의 존재를 원천적으로 지우기를 추진하고 나섰다. 1830년 '인디언 강제이주법'이 북부 출신의 양심 있는 의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연방의회에서 근소한 표차로 통과됐다.

■체로키족의 '눈물의 길'

체로키 부족은 촉토, 치카소, 크리크, 세미뇰족과 함께 소위 '5개의 문명화된 인디언 부족' 중 하나다.

연방정부에 의해 인디언 강제이주가 추진되자 체로키족을 제외한 나머지 4개 인디언 부족은 대부분 어쩔 수 없는 운명을 받아들여 1830년에서 1832년에 걸쳐 그들의 고향을 떠나 오늘날 오클라호마(오클라는 붉은색을 뜻하고 호마는 사람을 뜻하는 촉토 인디언의 말)에 있는 이른바 '인디언의 땅'으로 이주했지만, 체로키족은 대추장 존 로스(스코틀랜드계 아버지와 체로키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남)의 리더십 아래 북부에서 온 헌신적인 우스터 선교사 등의 지원을 받아 평화적으로 저항하면서 계속 버텼다.

체로키족도 백인들의 폭력과 협박에 못 이겨 1836년 말까지 약 6000명의 체로키족이 인디언의 땅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나머지 체로키족은 끝까지 떠나지 않았다. 많은 미국의 양심적인 백인들은 일부 강제이주에 찬성하는 소수의 체로키족 대표들만 서명한 '뉴에코타 조약'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의회에 체로키족의 강제이주를 집행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예를 들면 1838년 4월 23일, 당시 미국의 대표적 지식인이던 매사추세츠 콩코드 출신의 에머슨은 잭슨 대통령의 후계자인 뷰런 대통령에게 편지를 써 체로키족에 대한 엄청난 불법행위를 행사하지 말 것을 호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뷰런은 스콧 장군에게 강제이주 작전 명령을 내렸다.

스콧은 약 7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5월 17일 뉴에코타에 도착했다. 약 1만7000명의 체로키 인디언과 체로키족이 소유하고 있던 2000여명의 흑인 노예들은 살던 집에서 끌려나와 캠프에 수용됐다. 대부분은 짐도 제대로 챙겨오지 못했다. 캠프로 끌려온 인디언들은 몇 개 무리로 나뉘어 수천㎞에 이르는 강제이주의 길에 올랐다.

특히 전염병이 창궐하는 한여름과 겨울 추위 속에 이동했던 인디언들이 큰 어려움을 겪었다. 강제이주의 험난했던 길을 훗날 사람들은 '눈물의 길(Trail of Tears)'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 '눈물의 길'은 앞으로 계속될 인디언들의 고난의 시작이었다. 이 사건을 잊지 않기 위해 미국 의회는 1987년 강제이주 루트를 '눈물의 길 역사의 길'로 지정했다. 이 길은 9개 주에 걸쳐 있으며 길이는 총 3540㎞에 달한다.

■버네트 일병의 강제이주 동행 회고담

일등병 계급의 한 젊은 미군 병사로서 '눈물의 길'을 따라갔던 버네트는 1890년 12월 11일 그의 80회 생일을 맞아 자손들에게 눈물의 길에 관한 회고담을 들려주었다. 그 회고담은 눈물 없이는 읽기 어려울 정도로 슬프고 슬픈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그가 들려준 사연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테네시주에서 태어나 인근의 체로키 인디언들과 어울리면서 체로키 말도 익혔다. 세월이 흘러 말단 군인이 된 나는 체로키 말을 할 줄 알았기에 1838년 5월 인디언 강제이주 작전에 통역병으로 차출됐다. 나는 아무 죄 없는 체로키족들이 미군의 총검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자기네 집에서 붙잡혀 나와 강제로 우리 속으로 수용되는 것을 보았다. 또한 찬 이슬비가 내리는 10월의 어느 아침에 마치 소나 양처럼 645개의 마차에 실려 서쪽으로 떠나는 것을 보았다. 체로키족 아이들은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산속에 있는 그들의 집을 향해 작은 손들을 흔들며 떠났다. 이 불쌍한 인디언 중 대부분은 담요도 없었고 신발도 못 챙긴 채 집에서 쫓겨났다.

특히 11월 17일 마지막으로 수용소를 떠나 이듬해인 1839년 3월 26일 오클라호마에 도착한 체로키족은 눈폭풍과 영하의 날씨로 인해 고통이 더 심했다. 이 강제추방의 길은 바로 죽음의 길이었다. 밤에는 불도 피우지 못하고 마차 위나 땅위에서 자야만 했다. 나는 하루 밤 사이에 추위 등으로 22명이 목숨을 잃는 것도 목격했다. 체로키족 추장인 존 로스의 부인은 그가 가지고 있던 단 한 장의 담요를 아픈 어린이에게 덮어주고 자신은 밤새 추위에 떨었다. 감기에 걸린 로스 부인은 폐렴이 악화돼 1839년 2월 1일 세상을 떠났다. 끔찍한 강제이주는 도중에 4000개의 무덤을 만든 후 1839년 3월 26일 끝났다.

동부 체로키족의 추장 주날루스카는 잭슨 대통령과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였다. 1814년 크리크 전쟁 중 호스슈벤드 전투에서 잭슨이 크리크족에게 죽임을 당할 찰나에 주날루스카가 그의 토마호크 도끼를 휘둘러 극적으로 구출했다. 주날루스카는 체로키 네이션의 특사 자격으로 잭슨을 찾아가 위기에 처한 체로키를 구해 달라고 읍소했다. 그러나 지난날 생명의 은인에게 "이미 결정된 사실이니 자기로서는 여기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싸늘한 대답만 들려주었을 따름이었다. 주날루스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절규했다. "오, 신이시여! 내가 오늘과 같은 비극이 일어날 것을 호스슈벤드 전장에서 미리 알았더라면 미국의 역사는 달리 써졌을 텐데…"라고.

오늘 이 시점에서 젊은이들은 그때 있었던 일을 잘 모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백인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저항할 수 없는 체로키족으로부터 총검으로 강탈한 것이란 사실을 어린 학생들은 모른다.

불한당이 저질렀든, 제복 입은 군인이 행군 나팔소리 속에서 저질렀든 살인은 살인일 뿐이다. 따라서 누군가는 대답해야 한다. 1839년에 흘린 인디언의 피에 대해 누군가는 설명해야 한다.
추방의 길에서 죽어간 4000명의 무덤에 대해서도 누군가는 설명해야 한다. 위대한 심판자가 우리가 저지른 행동을 엄격히 평가해 그 대가를 치르게 해주기를 바란다.
내 자손들이여, 이것이 내가 약속했던 생일 이야기의 끝이다. 1890년 12월 11일.

김철 전 한양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