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전국

[비상 걸린 한국 수출, 현장을 가다](2) 부산 녹산국가산업단지 10곳 중 3곳 가동중단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01.25 16:45

수정 2016.01.25 21:44

곳곳에 "공장급매"
일주일에 한두번만 가동, 2차 하청업체 더 죽을 맛
금융사는 대출상환 독촉, 자산 팔아 운영자금 조달
부산 강서구 녹산국가산업단지에는 해운.조선경기 침체와 수출부진, 국제유가 하락 등에 따른 불황의 그늘로 곳곳에 공장매매나 임대를 알리는 현수막이 내걸려 있다.
부산 강서구 녹산국가산업단지에는 해운.조선경기 침체와 수출부진, 국제유가 하락 등에 따른 불황의 그늘로 곳곳에 공장매매나 임대를 알리는 현수막이 내걸려 있다.

【 부산=권병석 강수련 기자】 지난 22일 부산 강서구 녹산국가산업단지 내 모 조선기자재 업체. 이 업체의 생산공장은 긴 쇠사슬로 묶인 채 굳게 닫혀 있다. 4년 전만 해도 밀려드는 부품물량을 맞추느라 60여명의 종업원이 쉴 새 없이 일을 했다. 선박용 부품을 가공.납품하기 위해 고가의 기계도 도입했다. 그러나 현재 공장 가동률은 30% 미만. 일주일에 두 번 정도만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어렵다고 말하는 것도 이제는 지쳤다"며 "현재 공장 가동률을 낮추고 일손을 줄이는 등 하루하루 버티고만 있다"고 말했다.

■"일감 없어 하루 버티기도 힘들어"
새해를 맞아 한창 분주해야 할 공단도 썰렁했다. 중간중간 문을 닫은 공장들 사이로 보이는 주차장에는 고철더미만 쌓여 황량함을 더했다. 연초 활기로 넘쳐야 할 공단 거리에는 화물차가 돌아다니는 대신 '공장급매'나 '싼 값에 공장을 임대한다'는 현수막만 게시대를 채우고 있었다.

차가워진 날씨만큼이나 거센 불황 한파는 곳곳에서 감지됐다. 공단 진입로에 위치한 카고트럭 차고지에는 평일인데도 일감이 없어 주차된 차들로 차 있었고 수출포장센터 앞마당도 한산했다.

한국산업단지공단 부산지사에 따르면 녹산공단 내 입주업체 1549개 가운데 지난해 말 현재 가동하고 있는 업체는 1102개로 가동률은 71.6%에 그치고 있다. 휴·폐업 업체는 100여곳 정도로 집계됐지만 일감이 대폭 줄어 직원수를 줄이거나 급여를 삭감하는 등 긴축경영에 돌입한 2~3차 하청업체들이 줄을 잇고 있다.

수많은 공장들 가운데 가장 위기에 몰린 곳은 조선기자재 관련 공장들이다. 모기업의 신규 수주도 없는 데다 최근 단가인하 압박마저 심하게 받으면서 유동성 위기에 몰린 곳이 부지기수다.

현재 녹산공단 내에는 270여개의 조선기자재 관련 공장이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 중 정상적으로 공장을 가동 중인 곳은 손에 꼽힌다는 게 공단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선박용 비상등을 생산하는 한 업체는 지난해 일감이 전년보다 30% 넘게 줄었다. 영업적자가 심한 조선.해양부문보다는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영업활동이 예년만 못해 올해 매출목표는 지난해보다 더 낮춰 잡았다.

이 업체 박모 사장은 "새해 일감을 낮춰 잡기는 올해가 처음"이라면서 "주문물량이 줄어든 데다 단가 압박이 심해지면서 하루하루가 불안하다"고 하소연했다.

공장 이곳저곳을 돌며 만나는 이들마다 붙잡고 여러 가지 질문을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싸늘하기만 하다.

선박용 전문밸브를 생산하는 곳에서 일한다는 한 조선부품업체 관계자는 "1차 협력업체들도 휘청거리는데 우리 같은 2차 하청업체야 말할 것도 없다"라며 말을 아꼈다.

조금이라도 일감이 있는 업체는 그나마 낫다. 소리 소문 없이 기업들이 부도가 나 사라지거나 기업 자산을 팔아 운영자금으로 조달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녹산공단 인근 A은행 관계자는 "지난해부터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은 기업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며 "소규모 업체 사장들은 만나면 힘들고 어렵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산다"고 말했다.

조선기자재뿐만 아니라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철강업체나 일부 경공업 등의 상황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공단 내부에서 만난 한 철강 유통업체 관계자는 "지난해 수출 물량이 급감하면서 창고에 물품이 텅 빈 적이 많았다"며 "일부 소형업체들은 못 버티고 파산한 곳도 많다"고 전했다.

녹산공단 내 한 생산공장이 바리케이드가 쳐진 채 굳게 닫혀 있다.
녹산공단 내 한 생산공장이 바리케이드가 쳐진 채 굳게 닫혀 있다.

■은행마저 대출 기피

한결같이 어렵다는 말들이지만 활로는 보이지 않는다. 공단 내 상당수 업체들이 금융권의 신규대출은 물론 정책금융 지원이 제때 이뤄지지 않아 자금난을 겪고 있다고 한다.

섬유제품을 생산하는 한 기업체 관계자는 "신규대출은 물론이고 추가대출도 어렵다. 일부 금융사는 만기연장을 하는 대신 대출금을 전액 상환하라고 하거나 금리를 13%대까지 요구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특히 조선기자재업계는 장기화된 침체와 구조조정 여파로 사실상 '주의 업종'으로 분류돼 금융사들의 기피대상 1호가 된 지 오래다.

경남 통영의 한 은행지점장은 "대출 만기 연장이 안돼 당장 운전자금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인근 중소기업들이 여러 곳"이라며 "금융권이 조선기자재 회사는 '좀비기업'(한계기업)으로 보면서 사실상 조선업종은 끝났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금융권 차입이 어려워지면서 자금이 필요한 업체들의 심리적 압박감은 날로 커지고 있다.

선박용 도료를 납품하는 한 조선기자재 업체 대표는 "이자 내기도 힘든 판에 신규대출은커녕 대출금을 당장 상환하라고 요구하는데 막막하다"며 "부동산 담보를 들고 가도 대출은 예전의 절반밖에 안된다"고 전했다.

■패러다임 변화, 혁신 필요

조선기자재 업계 등의 불만이 고조되자 부산시는 지난해 말 업계와 비공개 간담회를 갖고 대책 마련에 나섰다.
부산시는 금융사에 대출 거부 업체 리스트를 요청해 실제 상환능력이 없는 것인지 금융사의 위험 회피인지 검토하겠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강제 규정이 없고 명확하게 이를 구분할 방법도 없어 허송세월만 하고 있다.


부산상공회의소 진순업 연구원은 "조선 부품 및 기자재업체들이 원청업체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지금의 형태로는 제대로 된 해법을 찾을 수 없다"면서 "단기적으로는 꾸준한 자금지원 등 금융기관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숨통을 터주는 한편 세계 해양.조선업 재편에 맞춰 기업의 수출 활로를 뚫어주는 등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bsk730@fnnews.com 권병석 강수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