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일반

[아메리칸 인디언을 찾아서(18)] 인디언 정책, 동거에서 분리로...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03.03 17:21

수정 2016.03.03 18:53

인디언보호구역에 가둬 농사 가르치고
아이들은 기숙학교 보내 백인문화 교육
1879년 설립 칼라일산업학교 서양옷 입히고 영어 가르쳐
목표는 '정체성 없애기'였지만 학생들 졸업 후 전통·종교 회복
인디언 문화 확산되는데 기여
인디언에 대한 백인들의 정책은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버지니아나 매사추세츠 등 대서양 연안에서 백인들이 처음으로 정착마을을 건설하기 시작할 당시에는 백인들이 인디언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감사하는 자세로 인디언을 대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백인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또 정착민 숫자가 늘어나면서 인디언과의 관계가 적대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시절과 미국 독립국가 초기에는 크고 작은 충돌 속에서도 백인과 원주민이 함께 살았다. 특히 '문명화된 5개 부족'은 백인의 생활방식을 그대로 따라해 백인들과 비교적 사이좋게 지낼 수 있었다.



■인디언 정책의 변화

1830년대 잭슨 대통령 시절부터는 이민자의 수가 늘어나면서 동부의 땅이 부족해지는 문제도 있고 또 붉은 피부색을 가진 인종과 함께 어울려 사는 게 싫어져 인디언과의 동거정책은 분리정책으로 바뀌게 된다. 이 정책에 따라 체로키족을 포함한 수많은 동부의 인디언들이 그 악명 높은 눈물의 길을 따라 오클라호마로 쫓겨갔다.

19세기 중반부터는 명백한 운명을 외치며 백인들이 서부로 이주해 감에 따라 평원 인디언과 서남부 인디언 그리고 로키산맥 너머의 인디언들과 갈등이 시작됐다. 곧 땅을 뺏으려는 백인과 이를 지키려는 인디언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계속됐다. 백인 정부는 동서를 관통하는 철도와 도로를 건설하고 새로 이민 오는 백인들에게 농지와 목장을 마련해주기 위해 강압적인 조약체결을 통해 인디언의 땅을 빼앗았다.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버리게 하고 백인 방식의 농민으로 전환시키게 되면 원주민의 드넓은 사냥터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계산에 따라 인디언보호구역으로 인디언들을 몽땅 가둔 후에 성인들에게는 농사법을 가르치고 어린 아이들은 학교로 보내 인디언들을 백인사회에 동화시키려는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칼라일 인디언 산업학교 학생들
칼라일 인디언 산업학교 학생들

■인디언 기숙학교

인디언기숙학교는 연방정부의 지원으로 주로 종교단체가 설립 운영하였는데 방치된 옛 정부 또는 군용 시설 등을 개조해 학교시설로 활용하는 사례가 많았다. 학교의 제1 교육목표는 인디언들로 하여금 인디언의 정체성을 버리고 백인의 문화를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따라서 집에서 매일 통학하는 경우에는 학습효과가 떨어질 우려가 있으므로 학생들을 모두 기숙사에 수용해 인디언 부족사회와 완전히 격리시키는 방식을 택했다. 기숙학교는 인디언보호구역 내에 설치되는 경우도 있었고 구역 밖에 설립되는 경우도 있었다.

■칼라일 인디언산업학교

인디언보호구역 바깥에 설치된 첫 기숙학교는 펜실베이니아주에서 1879년에 프래트 장군이 비어 있던 군용시설을 활용해 설립한 칼라일 인디언산업학교다. 칼라일학교의 교육목표는 한마디로 '인디언 안에 있던 인디언적인 것을 다 없애고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만드는 것'이었다. 프래트는 인디언 학생들을 백인 문화에 흠뻑 젖게 만들어서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다른 부족민들에게 이들이 배운 것을 전파시킴으로써 자연스레 모든 인디언들이 백인사회에 동화되기를 기대했다.

미국 정부는 가능한 한 가장 늦게까지 미국에 저항한 부족의 자녀들을 많이 입학시키기를 원했다. 자녀를 학교에 수용하면 인디언의 반란을 예방할 수 있는 볼모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따라서 수우족이 제일 먼저 접촉 대상으로 선정됐다. 카스터 장군 부대가 전멸한 리틀빅혼강 전투가 있은 지 몇 년 되지 않아 아직도 적대 감정이 많이 남아 있을 가능성을 우려해 프래트는 내심 망설였지만 정부의 방침에 따라 하는 수 없이 수우족 마을을 찾아가 추장의 자녀를 포함해 상당수의 학생들을 모집했다. 한편 1886년 9월에 제로니모가 투항한 후 수많은 아파치 인디언들은 전쟁포로로 취급되어 플로리다의 감옥에 수감되면서 그들의 자녀들은 칼라일학교로 보내졌다.

인디언 학생들이 학교에 도착하면 우선 인디언식 의복을 벗겨 서양식 복장으로 바꾸고 머리카락도 자른 후 이름을 기독교식으로 다 바꾸어 인디언의 말은 쓰지 못하게 하고 오로지 영어만 쓰도록 했다. 영어를 빨리 배우도록 하기 위해 같은 부족 출신 학생은 같은 방을 쓰지 못하게 했다. 이 학교는 질 높은 교육을 실시하였기 때문에 마치 백인들이 하버드나 예일로 진학하고 싶어 하듯이 많은 인디언들이 자녀를 칼라일로 보내기를 희망했다.

이 학교의 미식축구부는 최정상급의 실력을 자랑했다고 하는데 웨스트포인트와의 경기가 특별히 관심의 대상이 됐다고 한다. 왜냐하면 칼라일 학생의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인디언 전사로서 또 웨스트포인트 학생의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미군 장교로서 서로 죽이는 치열한 전쟁을 치렀기 때문이다. 1912년 11월 9일 벌어진 웨스트포인트와의 경기에서 칼라일이 27대 6으로 이긴 사건은 매우 재미있는 일화로 소개되고 있다. 훗날 대통령이 된 아이젠하워가 라인배커로서 그 경기에서 뛰었다고 한다.

1918년 9월 1일에 문을 닫은 칼라일학교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부정적인 평가도 동시에 받고 있다.
인디언들에게 신식교육을 시켜 인디언의 권익회복을 위한 힘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인디언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측도 있는 반면, 인디언의 전통을 완전히 무시하고 인디언을 백인처럼 만드는 일은 정신적 학살행위와 다름없는 행위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원래 교육을 통한 동화정책을 실시함으로써 인디언을 백인 주류사회로 흡수하게 되면 인디언이라는 인종은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으로 예상하였으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칼라일에서 공부한 사람들은 인디언의 전통과 종교를 회복하여 인디언의 문화를 유지 발전시키려는 선구자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
또한 전에는 다른 인디언 부족을 만날 기회가 없었는데 칼라일학교에 와서 서로 다른 부족과 만날 수 있게 됨에 따라 범인디언적인 민족의식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김철 전 한양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