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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돈 수천억 굴리다보면 밤잠 설칠 정도로 스트레스
수십억 받는 사람은 극소수.. 수익 안 좋으면 전출·퇴출
개인투자 '매미' 부러워도 회사 그만 둘 용기는 없어
#.펀드매니저가 남편으로서 좋은 직업인가요? 남자친구 다섯 번 만날 때까지 펀드매니저인 줄 몰랐어요. 그냥 증권사에 다니는 줄로만 알았죠. 친구들은 스트레스가 너무 많은 직업이라 평온한 가정생활은 포기해야 할 거라고 얘기하더라고요.
수십억 받는 사람은 극소수.. 수익 안 좋으면 전출·퇴출
개인투자 '매미' 부러워도 회사 그만 둘 용기는 없어
얼마 전 인터넷에서 우연히 본 글인데요. 제가 바로 그 펀드매니저입니다. 고객이 맡긴 돈을 주식.채권 등에 굴려 최대한 불려주는 일을 합니다. 직업사전에는 수익증권이나 뮤추얼펀드와 같은 간접투자상품을 개발해 투자고객에게 판매하고, 투자신탁의 재산을 운용하거나 또는 기관투자가의 펀드를 관리.운용한다고 돼 있습니다.
저는 8년째 펀드매니저로 일하고 있습니다. 국내에는 저와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이 600명쯤 되고, 일인당 운용하는 펀드 규모는 평균 4000억원가량입니다.
애초부터 펀드매니저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닙니다. 16년 전 대학(경제학)을 졸업하고 투신운용사에 입사했는데 마침 주식운용본부에 배치된 덕분에 이 길을 걷게 됐습니다. 보통은 애널리스트를 거쳐 4∼5년이 지나야 본격적으로 펀드 운용을 시작하는데 저는 조금 늦었습니다. 입사 초기에 섹터애널리스트를 맡았다가 다른 부서로 옮기고, 제조업체로 외도까지 했으니까요.
■초고액 수입은 극소수
펀드매니저는 여자 연예인(주로 외국 금융사에 근무하는)의 결혼 소식이 전해질 때 간혹 세간의 주목을 받곤 합니다. 신랑의 직업이 펀드매니저인 경우가 더러 있더라고요.
일반적인 시각에서 보면 꽤나 시집을 잘 가는 것으로 평가를 받는 듯합니다만 사실 펀드매니저의 수입은 천차만별입니다. 특히 펀드매니저라고 하면 '헤지펀드의 전설' 조지 소로스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기본적으로 같은 일을 하는 것은 맞지만 수입은 비교조차 되지 않아요. "10억, 20억을 벌었다"는 펀드매니저도 있지만 최상위권에 속한 몇몇 '스타' 펀드매니저에 국한된 얘기예요.
물론 펀드매니저가 억대 연봉(기본급)을 받는 것은 맞습니다. 성과에 따라 별도의 인센티브도 받습니다. 그렇지만 누군가 "만족하느냐"고 묻는다면 "아니오"라고 대답할 겁니다. 사실 인센티브도 '연봉의 50%' 식으로 상한선이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아요.
"배부른 소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남의 돈을 운용하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수익률 나빠지면 잠도 안 와요. 운용하던 펀드가 환매를 당하거나 처음에 1000억원 있던 펀드가 갈수록 쪼그라들면 펀드매니저는 그 존재 가치가 사라지게 됩니다. 펀드매니저들이 많이 걸리는 병 중 하나가 역류성 식도염이에요. 주로 술을 많이 먹으면 걸린답니다. 그런데 술 안 먹고도 걸려요. 과도한 스트레스가 사람을 잡는 거죠. 저는 큰 욕심을 버리고 중상위권 수익률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그마저도 쉬운 일은 아니랍니다.
■2년 계약직이나 마찬가지
한마디로 매달 성적표를 받아드는 수험생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수많은 펀드와 펀드매니저 사이에서 치열하게 경쟁을 벌여야 해요. 밤에 침대에 누워서도 태블릿으로 리포트를 보고,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하는 일도 미국시장 확인입니다. 가끔은 '정신이 피폐해진다'는 기분이 들 정도예요.
펀드매니저는 '2년 계약직'이나 마찬가지예요. 1년은 성과(수익률)가 다소 저조해도 참고 넘어가지만 이듬해에도 좋지 않으면 부서를 옮기거나 회사를 떠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대부분은 후자죠. 상대적 고수입이 이 같은 리스크에 대한 보상 내지는 직업의 안정성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첫해에는 50%의 수익률을 냈지만 다음 해에는 -30%를 기록했다고 쳐요. 전체적으로 20%의 수익률을 냈으니 나쁘지 않죠. 그러나 -30% 때문에 잘릴 수도 있는 게 펀드매니저라는 직업입니다. 다른 회사의 누가 실적이 좋지 않아서 회사를 나갔다는 소식이 들리면 '혹시 그다음은 내 차례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앞섭니다. 때로는 '내가 거기 빈자리로 옮겨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이 회사에서 기록한 좋지 못한 트렉레코드(실적)를 지워볼까 하는 거죠.
■'수익률 하락' 압박감 상상초월
경기상황에 상관없이 장기적으로 꾸준히 수익을 낼 수 있는 종목에 투자하는 것이 개인적인 펀드운용 원칙입니다. 이 원칙을 지키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 나름의 목표를 정한 후 2∼3년 앞을 보고 투자했는데 2∼3개월 만에 주가가 떨어지면 당황스럽죠. 실적이나 전망은 그대로인데 시장 상황이나 수급에 따라 주가가 하락하고, 단기성과가 나빠지기도 하니까요. "10∼20%가 빠졌는데도 가만 있느냐"며 압박이 가해지기 일쑤입니다. 이때 포트폴리오를 조정하게 되면 악순환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회로를 만들어놓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현대건설과 대림산업을 같이 놓고 봐요. 현대건설 주가가 부진해 윗분들로부터 혼이 나면 현대건설을 정리하고, 대림산업을 더 삽니다. 여러 의견을 반영하면서도 제 원칙을 지키는 거죠.
답답할 때도 많아요. 혹자는 장기판에서 훈수 두듯이 "저렇게 크게 오르는 종목을 안 사고 뭐했느냐"고 힐난합니다. 하지만 다 좋다고 다른 사람들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다가는 망해요. 꼴등 하는 펀드매니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롯이 내 것을 찾아서 오를 때까지 끈기있게 기다려야죠.
펀드매니저로 있는 동안에는 운용하는 펀드를 키워서 장기수익률 1등 했다는 평가를 받는 게 목표입니다. 그래서 연봉으로 확실히 보상을 받고 싶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경쟁력 있는 분야가 있고, 당장은 주목받지 못하고 있지만 언젠가 오를 것이라는 확신이 드는 종목도 있으니까요. 지금은 중형 종목군 가운데 니치마켓(틈새시상)에서 1등 하는 기업들을 눈여겨보고 있습니다.
■'대박' 매미 부러워도
지난 2013년부터 증권사들의 구조조정이 진행되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상당수 동료 펀드매니저들은 회사를 나와야 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매미(펀드매니저 출신 개미)'라는 이름으로 서울 여의도 일대 오피스텔에 삼삼오오 둥지를 틀었죠. 적게는 수천만원, 많게는 수억원의 퇴직금이 종잣돈이었습니다.
다행히(?) 화장품.모바일 게임.바이오 등을 중심으로 증시가 활황을 보였고, 대박 소식이 줄을 이었습니다. 수억원, 수십억원을 벌었다는 무용담이 여기저기서 들려왔습니다. 여의도역 인근 S트레뉴빌딩에서 거래되는 매매금액이 웬만한 중소형 증권사와 견줄 만하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어요.
솔직히 부러웠습니다. '나도 회사 그만두고 나가서 한번 해볼까'라는 욕심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투자자 10명 가운데 성공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알게 모르게 사라지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선물투자로 100억원을 벌었던 사람의 계좌가 며칠 새 1000만원으로 줄어드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웬만한 용기 없이는 못하죠. 지금으로서는 10%라도 망할 가능성이 있다면 절대로 못할 것 같아요. 하지만 나중에는 그렇게 될 거예요. 마음 맞는 사람들과 회사 차리는 게 꿈이에요. 제가 가진 재능을 활용해서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습니다.
blue73@fnnews.com 윤경현 기자
*이 기사는 우리나라 펀드매니저의 현실을 취재와 자료를 바탕으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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