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할 틈 없는 110분
초연임에도 완성도 높은 수작.. 제작자 말실수로 객석은 휑해
초연임에도 완성도 높은 수작.. 제작자 말실수로 객석은 휑해
"아… 진짜 잘 만든 작품인데…." 지난 6일 서울 대학로 수현재시어터에서 연극 '보도지침'의 공연이 끝난 뒤 휑한 객석에서 한 관객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도 이 작품이 휘말린 '여성 비하 논란'에 대해 잘 아는 공연계 인사였으리라.
잘 만들었다는 말 뒤에 '느낌표'가 아닌 '말 줄임표'가 붙은 이유가 여기 있다. 이 작품을 만든 엘에스엠컴퍼니 이성모 대표의 말실수가 발단이었다. '보도지침' 홍보 브로슈어에 작품을 기획하게 된 계기를 밝히면서 "2014년 여름, 세월호 사건으로 침체된 공연계에 20~30대 젊은 여성들을 겨냥한 저가의 가벼운 공연들이 넘쳐날 때였다. 그런 상황을 탈피해 모든 세대와 성별을 아우를 수 있는 공연을 보고 싶었다"고 말한 것이 화근이 됐다.
젊은 여성 관객들이 분노했다. 문제가 제기되자 이 대표는 바로 페이스북을 통해 공개 사과문을 올리고 홍보 브로슈어도 전량 폐기했지만 불 번지듯 커진 사태는 좀처럼 진화되지 않았다. 개막 전 예매율 1위를 달리며 기대를 모았던 이 작품에 돌아온 건 수백장의 취소표였다. 제작자가 주요 공연 관람층인 20~30대 여성 관객의 소중함을 간과한 것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하지만 작품 외적인 이유로 시작부터 관객에게 외면당한 '보도지침' 입장에선 다소 억울한 노릇이다.
창작 초연이 믿기지 않을 만큼 완성도가 높아서 더 그렇다. 논란을 뒤로하고 마주한 '보도지침'은 속도감 있는 연출과 '촌철살인'의 대사로 한순간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 극단 '걸판'을 이끌며 극작가 겸 연출가로 활약하고 있는 오세혁이 대본을 쓰고 지난해 뮤지컬 '러브레터'로 제9회 더뮤지컬어워즈 연출상을 수상하고 최근 연극 '날 보러와요', 뮤지컬 '아랑가' 등을 연출하며 주목받고 있는 변정주가 연출을 맡았다.
오는 6월 19일까지 공연하는 연극 '보도지침'은 언론계의 흑역사로 꼽히는 '보도지침' 사건을 다룬다. 1986년 전두환정권 당시 김주언 한국일보 기자 등이 월간 '말'지에 정부의 '보도지침'을 폭로해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법정에 섰다가 9년 만에 무죄 확정 판결을 받은 실화가 바탕이다.
다소 무거운 소재지만 참신한 설정과 탄탄한 대본을 통해 묵직한 메시지와 연극적 재미를 동시에 잡았다. 피고 김주혁 기자와 월간 '독백'의 발행인 김정배를 놓고 변호사 황승욱과 검사 최돈결이 벌이는 치열한 법정 공방을 기본으로 과거와 현재를 자연스럽게 넘나든다. 이들 모두가 대학시절 연극반을 함께한 친구였다는 설정 덕분이다.
무대는 특별한 무대장치 없이 몰입도를 유지하며 팽팽한 긴장감이 가득한 법정으로, '연극의 시대정신'을 외치는 동아리 방으로, 보도지침을 하달받는 신문사로 전환된다. 송용진, 김대현, 이명행, 최대훈 등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력과 쫀쫀한 호흡이 만나 짜릿함을 더한다. 가려운 데를 시원하게 긁어주는 대사는 비단 30년 전 독재정권만을 향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 작품에서 자주 나오는 대사로 대신한다. "몰라서 묻나."
이다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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