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 칼럼] 트럼프는 중국 편?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05.16 17:13

수정 2016.05.16 17:13

"달러 찍어 빚 갚겠다" 기축통화국 오만 드러내
결국 中 '위안굴기' 돕는 꼴
[곽인찬 칼럼] 트럼프는 중국 편?

시인 김광균(1914~1993년)은 '추일서정'에서 "낙엽은 포오란드망명정부의 지폐"라고 읊었다. 보잘것없다는 뜻이다. 개성에서 태어나 개성상고를 나온 김광균은 천부적으로 비즈니스 감각이 탁월했던 것 같다. 시에도 그런 감각이 녹아 있다. '포오란드망명정부의 지폐'는 쓸모없는 돈이다. 교환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누가 약소국 폴란드, 그것도 망명정부가 발행한 돈을 받겠는가. 그런 돈은 낙엽처럼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일 뿐이다.

생각할수록 일제강점기에 독립공채를 산 분들이 존경스럽다. 이들이 진짜 애국자다. 버리는 셈치고 독립자금을 댔다. 독립공채는 상하이 임시정부가 원.달러 두 가지 통화로 발행했다. 이때 달러화 표시 채권은 하와이 동포들이 많이 샀다고 한다. 해방 되고 한참 지난 1983년에야 비로소 '독립공채 상환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만들어졌다. 많은 분들이 원리금을 돌려받았다. 마지막 1원, 1센트까지 모두 돌려드려야 마땅하다.

돈은 신뢰를 먹고산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사피엔스'의 저자인 유발 하라리는 현 세계질서를 형성한 3대 요소로 돈.제국.종교를 꼽는다. 하라리는 묻는다. "왜 우리는 겨우 색칠한 종이 몇 장을 받자고 기꺼이 햄버거를 뒤집고, 보험을 팔고, 못된 아이 세 명을 봐주는가." 그것은 우리가 돈이라는 '집단적 상상의 산물'을 믿기 때문이다. 내가 미국 달러를 신뢰하는 이유는 이웃들도 달러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이웃이 달러를 신뢰하는 이유는 내가 달러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미국이라면 진저리를 치던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이나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도 달러엔 머리를 숙였다.

거꾸로 신뢰가 깨지는 순간 돈은 휴지가 된다. 제1차 세계대전 뒤 독일 바이마르공화국(1919~1933년)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 프랑스.영국 등 승전국들은 독일에 가혹한 전쟁배상을 요구했다. 배상금은 금이나 외환으로 갚아야 했다. 빚에 쪼들린 나머지 독일은 마르크화를 마구 찍었다. 그 순간 마르크의 가치를 방어하던 신뢰의 둑이 무너졌다. 동시에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덮쳤다. 1921년 달러당 90마르크 수준이던 환율은 2년 뒤 달러당 4조마르크로 뛰었다. 더 이상 마르크는 돈 취급을 받지 못했다. 그 뒤 독일인들은 인플레이션이란 말만 나와도 경기를 한다. 금융위기가 터지고 나서 독일 정부가 그리스 등 흥청망청 부채국들을 닦아세운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돈이라고 다 같은 게 아니다. 등수를 매기자면 빈 라덴이나 후세인도 무릎을 꿇어야 1등 돈이다. 미 달러는 전후 한번도 1등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이런 돈을 기축통화라 한다. 뒤늦게 중국도 '위안굴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진정한 슈퍼파워는 기축통화국임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은 멀어 보인다. 덩치는 커졌지만 위안에 대한 국제사회의 신뢰는 아직 얕다.

그런데 뜻밖에 우군이 나타났다. 바로 미국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자리를 굳힌 도널드 트럼프다. 트럼프는 얼마 전 "미국 경제가 망가지면 채권자들과 (빚 재조정) 협상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협상 1순위는 중국이 될 것이다. 중국은 미국 국채를 가장 많이 보유한 나라다. 2월 현재 1조2523억달러에 이른다. 우리보다 16배나 많다. 자연 중국이 갑, 미국이 을이다. 협상장에서 중국이 거드름을 피워도 속이 타는 쪽은 미국이다.

트럼프는 또 미국은 돈을 찍어낼 수 있기 때문에 채무불이행(디폴트)은 있을 수 없다고도 했다. 기축통화국의 오만이다. 함부로 찍은 돈은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신뢰에 금이 가는 순간 기축통화국 지위도 위태롭다. 미 외교전문지 '포린 폴리시'는 최근 "트럼프에게 투표하면 중국에 투표하는 것"이라는 분석기사를 실었다. 만약 '트럼프 대통령'의 명령으로 미군이 동아시아에서 철수하면 그 힘의 공백을 중국이 차지하게 될 것이란 내용이다.
돈도 마찬가지다. 달러제국이 무너지면 신바람이 나는 건 위안이다.
알고 보니 트럼프가 중국의 비밀요원이더라는 우스갯소리가 꼭 우습게만 들리지 않는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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