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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스트리트] 국보 1호

이재훈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06.01 17:00

수정 2016.06.01 17:00

대한민국 국보 1호는 숭례문(남대문), 보물 1호는 흥인지문(동대문)이라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안다. 보물보다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국보로 지정한다. 마지막인 319호 허준의 동의보감까지 모두 317건이 국보로 등록돼 있다. 지정번호와 등록 숫자가 맞지 않는 것은 2건이 '가짜' 등의 사유로 지정취소된 탓이다.

미국, 일본, 중국 등 다른 나라의 국보 1호는 어떤 것들일까. 언뜻 떠오르지 않는 게 당연하다. '없다'가 정답이다.
문화재에 지정번호를 매기는 나라는 한국뿐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일본의 국보 1호를 교토 고류지(廣隆寺)에 있는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일본문화재위원회가 조각부문 1번으로 올려놓은 것일 뿐 공식 지정번호가 아니다. 중국은 '진귀문물' '일반문물'로만 구분해 관리한다. 미국의 경우 수없이 많은 국보가 있지만 번호는 없다. 독립선언문, 자유의 여신상, 59개의 국립공원뿐 아니라 할리우드 뒷산의 'HOLLYWOOD' 입간판도 국보로 지정했다. 심지어 마틴 루서 킹 목사, 디즈니랜드를 창설한 월트 디즈니 같은 인물도 국보다.

왜 유독 우리나라만 국보에 지정번호를 뒀을까. 1933년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문화재에 지정번호를 도입했다. 지금처럼 국보, 보물로 분간하지 않고 보물만 지정했는데 1호가 숭례문, 2호가 흥인지문이었다. 정부는 1955년 일제강점기에 지정된 보물을 죄다 국보로 승격했고 1962년에서야 '문화재보호법'을 만들어 국보 116점과 보물 386점으로 나눠서 다시 지정했다. 결국 지정번호는 일제강점기 때를 답습한 것이다. 일제는 문화재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편의상 건축-조각-회화의 순으로 번호를 매겼다. 문제는 대다수 시민들이 국보 지정번호를 문화재의 서열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재제자리찾기 등 3개 시민단체가 20대 국회 개원을 맞아 국보 1호의 교체를 청원했다. 이들의 주장은 국보 1호를 숭례문에서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70호)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 숭례문은 일제에 의해 1호로 지정된데다 2008년 화재로 원형이 훼손됐고 이후 복원 과정에서 부실과 비리가 드러났다는 얘기다. 문화재청은 "지정번호가 문화재의 서열이나 중요성을 나타내는 게 아니다"라며 국보 1호 재지정에 반대한다.

숭례문도, 훈민정음도 더없이 소중한 문화재다.
후손들이 선조의 유산에 대해 서열을 매긴다는 발상 자체에 공감하기 어렵다. 문화재청도 지정번호제의 폐지를 검토 중인 모양이다.
다만 제도 폐지 작업에 최대 451억원의 비용이 드는 것으로 분석돼 문화재청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ljhoon@fnnews.com 이재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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