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전시·공연

[그림산책] 동양적 정신과 물질의 조화

정순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06.02 17:14

수정 2016.06.03 10:13

정창섭 '묵고'
정창섭 '묵고'
정창섭 '묵고'

한지의 원료인 닥을 사용해 물성과 수행을 합일시키며 '그리지 않는 그림'을 통해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모색해온 화가 정창섭(1927∼2011).

한지의 원료인 닥이 지닌 고유의 생명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자신을 비운 정 화백은 생전에 "나의 작업은 주어진 종이 표면에 어떤 우연적 과정을 펼쳐놓은 것이 아니고 종이의 원료인 닥을 주무르고 반죽해 손으로 두드리는 전 과정을 통해 종이의 재질 속에 나의 숨결, 그리고 혼과 체취가 녹아들어 마침내 하나가 되게 하는 과정이다. 도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선의 세계를 맛보는 것처럼 동양적 정신과 물질의 조화를 나는 적막한 내 작업을 통해 이루려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재료가 안료가 아닌 종이 원료인 닥이란 것, 그것을 손으로 건져내 캔버스 위에 펼쳐놓고 어떤 모양으로 나타날까를 기다리는 것이 바로 그의 작업의 바탕이다. 그는 한지보다 두껍고 거친 닥을 물에 넣고 불린 뒤 캔버스 위에 붙여놓고 손가락으로 하염없이 누른다. 닥을 물에 불린 시간에 따라 명도와 채도가 변화하는 모습을 생각해 이를 건조시키면 고유의 선과 주름이 캔버스에 형성된다.
그렇게 탄생한 그의 작품에는 그의 혼과 체취가 담겨있을 뿐만 아니라 닥의 고유한 생명력이 그대로 살아있다.


미술평론가 오광수는 이에 대해 "작가와 작품이 종속적인 관계를 벗어나 대등한 관계에서 서로 융화되고 있다"며 "닥 시리즈는 어린 시절 창호지를 통해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갖는 푸근함, 그리고 창호지 속에 넣은 코스모스, 국화잎의 은은함과 또 여기에 비유되는 하얀 밥에 대한 정서적 원형 회귀를 가능하게 한다"고 말했다.
또한 정 화백은 이에 대해 "우리 민족적 감성의 상징인 닥을 통해 나의 실존과 닥의 물성이 하나로 동화됨으로써 내 그림이 나와 내가 속한 우리 사회와 시대를 정직하게 반영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회고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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