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화에서 추상화로 내 그림은 지금 달라지고 있다
에프앤아트 스페이스 재개관 기념 16일부터 개인전 여는 '벽돌작가' 김강용 화백
몇년전 양평 항금리에 정착.. 작업실엔 '벽돌' 그림 가득
'벽돌작가'로 유명한 김강용(66)이 오는 16일부터 서울 효창동으로 이전한 에프앤아트 스페이스의 재개관을 기념하는 개인전을 연다. 지난 2014년 한국국제아트페어(KIAF)의 가장 큰 부스에서 전시한 바 있지만 국내 개인전을 통해 신작을 선보이는 것은 2009년 갤러리 박영 개관 1주년 기념 전시 이후 거의 7년만이다. 최근 10년간 국내보다는 해외에서 더 주목받으며 활동을 펼치고 있는 그의 이번 전시에 더욱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김강용 작가는 지난 40년간 같은 소재를 그려왔지만 화면에 담기는 사유와 이미지는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고영훈, 이석주, 지석철 등과 함께 '극사실주의 1세대'로 통하는 그는 실제보다 더 정교한 벽돌 그림에서부터 2차원의 회화를 3차원으로 확대하는 실험, 사실화와 추상화의 경계를 허무는 등 다양한 시도를 통해 회화의 본질,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탐구해왔다.에프앤아트 스페이스 재개관 기념 16일부터 개인전 여는 '벽돌작가' 김강용 화백
몇년전 양평 항금리에 정착.. 작업실엔 '벽돌' 그림 가득
전시에 앞서 경기도 양평군 항금리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먼저 차 한잔 하자"며 안내한 곳은 그의 살림집. 한옥에 서양식 마루와 방, 부엌 등을 연장해 증축한 건물은 그 자체로 독특한 분위기를 풍겼다. 동서양의 오묘한 조화는 서양화가 김강용과 그의 부인인 동양화가 김인옥의 만남 그 자체였다.
■세계가 주목한다
국내 전시가 뜸했던 이유를 물으니 그간 해외 활동이 잦았단다. 김강용은 국내에서는 물론이고 해외에서 더 잘나가는 작가다. 그가 처음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99년 쾰른 아트페어. 출품작이 전부 팔려나갈 만큼 인기를 끌었다. 이후 바젤, 시카고 아트페어, 도쿄 현대아트페어 등 국제적인 아트페어에 참가하며 한국 미술의 위상을 높였다. 독일, 미국, 중국에서 수차례 개인전도 열어왔다. 지난 2009년 중국미술관과 베이징 798 예술구의 T아트센터에서 연 대규모 개인전은 중국 내 그의 높은 위상을 확인시켰다. 특히 T아트센터 전시는 200호 크기의 대작부터 '땅콩 작품'이라 불리는 소형 작품까지 100여점에 달하는 작품이 전시됐다.
'798 예술구'는 베이징 동북쪽 다산쯔(大山子)에 위치한 예술지구로 중국 최대 화랑 밀집 구역이다. 원래 무기 공장이 있던 지역인데 냉전이 끝나고 군수산업이 철수하고 남은 공간에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2006년부터는 중국 정부에 의해 문화창의산업 집중구로 지정되며 세계적인 예술공간으로 주목받았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 정점을 찍었다.
김강용 작가가 동양화가인 부인 김인옥 작가와 함께 이곳에 작업실 겸 갤러리 '위드 스페이스(With Space)'를 오픈한 것도 베이징 올림픽이 개막하던 2008년 8월 8일이었다.
―작업실은 그렇다치고 갤러리는 왜 만들었나.
▲중국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현지 작가들과 갤러리 오너, 콜렉터를 만났다. 한국 미술이 굉장히 우수하고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한국 미술에 대한 자부심이 생겼다. 그런데 많이 보여줄 기회가 없었다. 마침 작업실을 꾸미려고 얻은 공간이 기다란 형태여서 반으로 나눠 갤러리를 운영하기로 결심했다.
―어떤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했나.
▲주로 한국 신진 작가들의 작품이었다. 재능은 있는데 경제적으로 힘들어 하는 후배 작가들의 개인전을 열어줬다. 당시 798에 한국 갤러리가 약 20개 정도로 상당히 많은 편이었다. 그런데 5년 정도 지나면서부터 경기가 안 좋아졌다. 표갤러리 같은 잘나가는 갤러리도 2013년에 문을 닫았다. 우리 갤러리도 2014년 여름에 철수했다.
―아쉽지 않았나.
▲애초에 길게 보고 시작한 것은 아니어서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지만 경제적으로 역부족이었다. 전시 오픈 해주는 건 별 일이 아닌데 중국과 한국을 오가는 작품 운반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이러다 우리까지 망하겠다 싶었다.(웃음)
■항금리, 삶이 곧 그림이 되다
다시 한국, 양평. 1990년 일찌감치 이곳 경기도 양평 항금리에 자리잡은 그는 20년 넘게 양평과 서울을 오가며 지내다 몇 년 전부터 이곳에 아예 정착했다. 돈이 조금 모이면 2층을 올리고 집 앞에 농사짓던 밭을 한평 두평 사 모아 여름에는 녹음이 우거지고 가을엔 단풍이 물드는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었다.
그 모습이 부러웠는지 그림 하는 사람들이 김강용 부부를 따라 많이들 항금리로 들어왔다. "나름 예술인 마을이 됐어요. 하하. 풍광이 좋은데 개발제한구역이라 변함이 없고 서울에서 가까우니 이만한 데가 없죠."
잔디밭을 사이에 두고 서 있는 2층 건물은 5년 전 지어 올린 그의 작업실 겸 갤러리다. 도화지처럼 바깥도 안도 새하얀 공간에 자리한 그의 작품들이 도드라져 보였다. 특히 1층 오른쪽 공간은 완성작을 걸어 둔 갤러리로, 전시회 미리보기나 다름 없었다. 오랜만에 여는 개인전인 만큼 만반의 준비가 다 돼 있었다.
"내년 독일에서 마이클 슐츠 갤러리와 함께 여는 개인전에 앞서 국내에서 먼저 작품을 공개하게 됐다"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엔 설렘이 가득했다. "보여줄 작품이 부족해서 작품 수 채우기에 급급하는 건 나와 맞지 않아요. 1년 전에는 작품이 완성돼 있어야 해요. 그리고 여유있게 전시에 어울리는 작품을 고르는 거죠. 이번 전시는 당연히 전부 신작, 첫 공개입니다."
갤러리를 나와 들어선 맞은편 작업실은 흡사 치열한 전장(戰場) 같았다. 색색의 모래가 담긴 자루에 둘러싸인 작업대 위에는 푸른색 계열의 무수한 벽돌이 생겨나고 있었다. 김강용의 작업 방식은 이렇다. 먼저 접착제를 섞은 모래를 캔버스에 얇게 바른 다음 하루 정도 말린다. 그런데 그 위에 그리는 것이 벽돌이 아니라 벽돌의 그림자다. 그림자를 그리고 보니 빛이 머문 자리에 입방체가 드러나는 식이다. 이를 벽돌로 인식하는 것은 사람들의 눈이다. 생생하게 드러난 벽돌 형상에 관람객들은 신기해하며 몇 번이고 그림을 들여다 본다.
■"나는 벽돌을 그리지 않는다"
"전 세계에서 이런 표현 기법을 쓰는 작가는 나밖에 없다"고 김강용 작가는 자신있게 말한다. "누구도 똑같이 할 수는 없어요. 비슷한 작업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김강용 아류라고 해야겠죠."
그러면서 자연스레 최근 '대작 논란'에 휘말린 가수 조영남 얘기가 흘러나왔다. 조영남과 친분이 있다는 그는 "내가 그리기 때문에 의미가 있고 다른 사람이 손 대면 그 자체로 의미가 없어진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조수를 쓰지만 뒷바라지 하는 역할일 뿐입니다. 미술에서 '대작(代作)'은 없는 말입니다. 조영남씨가 큰 착각을 한 거죠. 대신 그려주는 게 죄일 줄 모른 무지가 바로 죄죠."
벽돌을 처음 그리기 시작한 건 스물여섯살 때인 1976년 무렵이다. 당시 유화 물감을 사용하지 않고 다양한 방식의 표현 기법을 시도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 "처음 모래를 사용한 건 1975년이었어요. 질감 표현에 효과적인 도구라고 생각했죠. 이듬해부터 벽돌을 그리기 시작했으니 벽돌만 그린지 벌써 40년이 됐네요."
―왜 모래이고 벽돌인가.
▲모래알이 모여 벽돌이 되고 벽돌이 모여 구조물이 된다. 사람이 모여 단체가 되고 단체가 모여 국가가 되는 이미지와 상징적으로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이런 스토리텔링을 가지고 시작했지만 그 의미가 사라진지 오래됐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 의미인가.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회화의 본질이다. '본다'는 것의 의미 말이다.
―그것이 벽돌과 무슨 상관인가.
▲벽돌이 아닌 입방체다. 1950년대에 이미 2차원의 회화에서는 더 나아갈 곳이 없을 상태가 됐다. 그때 많은 화가들이 원점으로 돌아가 점, 선, 면에 집중했다. 최근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한국의 단색화가 그렇다. 나는 면 다음을 입방체로 봤다. 입방체 가운데 가장 단순하고 근본적인 것이 네모 반듯한 벽돌 아닌가.
■구상인가 추상인가
김강용의 그림은 완전한 구상도, 추상도 아닌 그 사이 어디쯤에서 부유하는 듯하다. 그 역시 자신의 그림을 "추상적 개념으로 그린 사실화"라고 말한다.
구상을 그리는데 추상적이라니. 그러나 하나씩 따져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우선 그의 그림에는 사실화의 기본인 원근이 없다. 화폭에 놓인 입방체들은 전부 크기가 같아서 화가의 시점이 어디에 놓였는지 알 수 없다. 덕분에 보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 원근감을 느끼는 재미가 있다.
보고 그리는 것이 없다는 점도 사실화가 아닌 추상화에 무게를 싣는다. 그의 벽돌은 현실이 아닌 상상 속에 있다. 그는 "사실주의 화가의 90%는 사진을 보고 그린다"며 "나는 이미 떠나온 영역"이라고 했다.
벽돌의 흠집도 그의 상상으로 났다. 많이 내지도 않는다. "가장 절제된 표현으로 가장 표현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게 그의 노하우다. "어떤 콜렉터가 내 그림을 사고 싶은데 흠집이 좀 났다며 이것만 좀 고쳐달라고 하더라고요. 하하."
절제된 표현 역시 추상화의 맥락이다. 추상화는 보통 '상이 없다'고 생각하게 마련이지만 그는 "필요한 것만 선택하는 작업이 더 본질적인 접근"이라고 강조한다.
최근 그가 더욱 몰두하고 있는 것도 단순화와 표현의 절제다. 과거에 그가 객관적 형태를 사진 못지 않게 그야말로 극사실적으로 표현했다면 그의 그림은 점차 이미지화되면서 전체 화면 구성에 더 신경쓰고 있는 추세다. 미술평론가 로버트 모건은 "화면이 어떻게 구성됐는가를 이해하기 전에 주제 선택 전반과 관련된 의미를 캐보고 싶은 충동이 일겠지만 그의 작품은 정밀 묘사된 이미지에 대한 것이 아니다"라며 "보다 근본적으로 공간과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환영에 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2차원에서 3차원으로
김강용의 그림이 비범한 이유는 또 있다. 2차원의 회화를 3차원으로 확장한다는 점에서다. 3차원의 공간을 점유하는 작업이 조각가가 하는 일이라면 그는 착시 현상을 통해 2차원에서 3차원의 세계로 이행한다. 직육면체의 6면 전체에 그림을 그리는 식이다.
―왜 3차원을 꿈꾸나.
▲과학이 발달하면서 화가가 할 일을 사진기, 컴퓨터가 대신하게 됐다. 2차원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싶었다.
―3차원에 그리는데 어떻게 2차원의 확장인가.
▲구조물 자체는 3차원이지만 그렇다고 그걸 조각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회화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새로운 회화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좀 엉뚱한 질문 같지만, 내내 벽돌만 그리니 지루하지 않나.
▲지루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스님이 절에서 도(道)를 닦듯 예술가는 현실에서 도를 닦는다. 오랫동안 한 작업을 이어온 사람에게는 그 누구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남다름'이 있게 마련이다. 이는 어마어마한 시간과 끈기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dalee@fnnews.com 정순민 이다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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