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북한

살기보다 죽음을 선택했던 한국전 참전 공군 조종사들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06.24 16:25

수정 2016.06.24 16:25

공군, 선배들의 업적에 감사하는 보훈행사 열어
공군은 한국전쟁 66주년을 하루 앞둔 24일 공군참모총장 주관으로 공군회관에서 '6·25전쟁 출격 조종사 초청 보훈행사'를 열었다
이번 행사에는 6.25출격조종사회 김두만 회장을 비롯한 출격 조종사들이 참석했다.

특히 이들 중 김 회장과 윤응렬 예비역 소장, 박재호 예비역 준장 등 3명은 '승호리 철교 차단 작전'에 참여한 주인공들이다. 윤 예비역 소장과 박 예비역 준장은 당시 세 번째 출격에서 각각 편대장과 편대원으로 참여해 실제 철교를 폭파시켰다.

승호리철교는 평양 동쪽 10㎞ 지점의 대동강지류에 설치된 철골 다리로 전쟁기간 중 북한군이 중동부전선으로 군수물자를 수송하는 요충지였다.

이런 전략적 가치때문에 유엔공군은 승호리 철교를 폭파하려고 500회 이상 출격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당시 한국공군은 이 철교를 파괴할만한 전투역량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손으로 폭파시키겠다는 신념으로 유엔공군을 대신해 작전수행에 나서게 됐다.

1952년 1월 12일 김두만 소령을 편대장으로 한 F-51D 6대가 첫 출격을 하고 같은날 오후 윤응렬 대위가 이끄는 6대가 출격했다. 그러나 두번의 출격에서 모두 폭탄을 투하했으나 실패했다.

당시 작전책임자였던 제1전투비행단의 김신 대령은 이 실패가 미공군 전술교리에 따른 고공투하 때문이라고 결론짓고 초저공침투공격법을 쓰기로 방침을 세웠다.

이는 4000피트 고도에서 1500피트까지 저공으로 접근하는 전술이었는데, 북한군의 대공포화가 2000피트까지 도달했던 것을 감안했기 때문에 '죽음의 비행'이라고 불릴 정도로 위험한 작정이었다.

같은달 15일 제1편대장 옥만호 대위, 2번기 유치곤 대위, 3번기 박재호 대위 그리고 제2편대장 윤응렬 대위, 2번기 정주량 대위, 3번기 장성태 대위가 출격했다. 북한군의 맹렬한 대공포화를 속에서도 우리 공군은 폭탄 12발과 로켓탄 20발, 기총 4700여발을 퍼부으며 승호리 철교 중앙 부분에 두 개의 커다란 구멍을 뚫어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한국공군의 독자적인 작전능력을 과시하게 되었고, 철교의 차단으로 북한공산군의 물자수송은 막대한 지장을 받게 되었다.

한국전쟁 개전초기 우리 공군은 창설된 지 9개월 밖에 되지 않아 L-4/5, T-6 등의 경비행기만 보유한 상황이었다. 이에 비해 북한군은 소련으로 지원받은 200여대의 야크(Yak) 전투기를 보유해 불리한 상황에서도 조국을 수호하겠다는 의지로 손으로 폭탄을 투하하면서 사투를 벌였다. 한국 공군의 전투정신에 감동한 미군은 후에 미군의 정예기인 F-51D 무스탕을 한국 공군에 지원하게 됐다.

F-51D 출격 조종사 115명 가운데 39명은 대공포화망 의 위험 속에서도 100회 이상 출격이라는 놀라운 전적을 세웠다. 우리 공군 최초의 100회 출격을 달성한 김두만 회장을 비롯해 1965년 과로로 순직한 유치곤 대위(순직당시 공군 준장)는 총 203회 출격을 달성했다. 유치곤 대위는 영화 빨간마후라의 주인공 나관중 소령의 모델이었으며 영화 주제가와 같은 일생을 산 전투조종사였다,
공군에 따르면 전쟁 기간 동안 조종사들은 총 1만4163회(F-51D 8457회, L-4/5 및 T-6 5706회) 출격했다.
적 군용건물 1799곳, 보급소 1229곳, 철로·도로·철교·교량 1220곳, 벙커 845곳 등을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129명의 조종사 가운데 25명(전사자 23명, 순직자 2명)이 전쟁 기간 중 조국의 하늘을 지키다 장렬히 산화했고, 현재는 39명의 조종사가 생존해있다.


정경두 공군참모총장은 이날 행사에서 환영사를 통해 "여기 계신 출격 조종사 대선배님들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의 대한민국과 공군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뜨거운 애국심과 투철한 군인정신을 이어받아 확고한 전방위 대비태세를 확립한 가운데 최강의 정예 공군 육성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captinm@fnnews.com 문형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