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당신들을 '구조 불이행 혐의'로 체포합니다". 부부는 억울하게 철창신세를 면치 못하게 됐다. 비행시간이 촉박해서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뜬 것인데 그저 택시기사를 방치했단 이유로 벌을 받아야 한다고? 물론 택시기사가 그날 숨을 거둔 것은 안 된 일이다. 도덕적인 비난 정도야 받을 수 있다. 그런데 법적 제재를 받아야 한다니? 지나가는 운전자를 비롯해 자신들 말고도 그를 구할 사람은 충분히 많았다.
■ 범죄 외면하면 처벌하는 '착한 사마리아인 법'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 기억하시나요? 심장마비로 의식을 잃은 택시기사를 방치하고 골프여행을 떠난 부부 승객에 많은 사람이 분노했죠. 위의 이야기는 지난 6월 발의된 '착한 사마리아인 법'이 이미 한국에서 시행되고 있었다면 부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상상해본 것입니다. 실제로 부부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은 받았을지언정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죠. 이들을 처벌할 법적 조항이 대한민국에 따로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 도로교통법상 운전자나 승무원에게는 구조 책임이 있지만 반대로 운전자나 승무원이 생명의 위험에 처했을 때 승객에는 구조 책임이 없습니다. 응급의료법 5조 1항에서 "누구든지 응급환자를 발견하면 즉시 응급의료기관에 신고해야 한다"고 정하고 있긴 한데요. 위반 시 어떻게 처벌할지는 명시돼 있지 않아 의무를 위반해도 처벌은 받지 않습니다.
강도를 만나 길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구해준 성경 속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서 유래한 착한 사마리아인 법. 10월 말 국회에서 구조 불이행 시 법적 제재를 가하는 이 법에 대해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 법이 시행되면 '위험에 처한 사람을 도울 것이냐, 말 것이냐'란 문제는 더는 개인의 선택사항이 아니게 됩니다. 위기 상황을 목격한 사람은 누구나 구조 의무를 지는 것입니다. 택시기사를 방치한 부부는 명백한 '유죄'가 되는 것이죠.
■ 개인의 양심 문제가 아니다
반대 목소리도 적지 않습니다. 도덕적인 영역을 법으로 강제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 침해'라는 의견이 주인데요. 이에 찬성 측은 해당 문제를 단순히 개인의 양심 문제로만 봐서는 안 된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개인주의가 확산하는 사회, 구조당국에 신고하는 것과 같이 최소한의 범위에서 구조 의무를 부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자신에게 특별한 위험이 발생하지 않는데도 곤경에 처한 사람을 구하지 않은 경우에 한해 처벌하자는 것입니다.
미국의 '키티 제노비스 사건'은 그 필요성을 여실히 느끼게 합니다. 1964년 3월 13일 뉴욕 퀸스 지역 주택가에서 키티 제노비스란 이름의 여성이 강도에게 무참히 살해됐습니다. 이 일은 당시 어떤 사건보다 미국을 충격에 빠뜨렸죠. 무려 서른여덟 명이 제노비스가 살해되는 현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목격했지만 단 한 명도 도움의 손길을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후 목격자가 많으면 책임감이 분산돼 피해자를 돕지 않고 방관하는 심리 현상을 '제노비스 신드롬'이라고 부르게 됐습니다. 개인의 이기심을 떠나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 대신 누군가가 도와주겠지'란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죠. '묻지마 범죄'가 횡행하는 시대, 공포심에 이 같은 심리는 더 크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 '착한 사마리아인'을 보호하자
"도와주려고 한 행동인데 되레 가해자로 몰리니 황당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못본 척 하는 건데…."
각종 뉴스에서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우려다 되레 가해자로 몰리는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응급조치를 취했는데 성추행범으로 몰리거나 폭행 당하는 사람을 구하려다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는데 쌍방 폭행으로 입건되는 등 억울한 일을 겪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죠. 현행법상 CCTV나 목격자 진술 같은 증거가 없으면 처벌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이 같은 이유로 응급상황을 목격하더라도 외면하는 사람이 다수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 법은 이처럼 선의로 타인을 도우려고 한 사람도 보호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할 것을 우려해 위급상황을 외면하는 일은 적어도 줄어들 수 있는 것이죠.
■ 다른 나라는?
여러 국가에서 착한 사마리아인 법을 작거나 크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독일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와 오랜 유럽 식민지 역사로 유럽법의 영향을 받은 남미 국가에서 착한 사마리아인 법을 시행하고 있죠. 프랑스는 가장 높은 형을 정하고 있는 국가로 징역 5년형이며 불가리아와 폴란드는 그 다음으로 높은 형인 징역 3년형입니다.
이외 독일·이탈리아·헝가리는 징역 1년, 체코 징역 6개월, 덴마크·이탈리아·네덜란드·노르웨이는 징역 3개월입니다. 핀란드와 터키는 벌금형에 처합니다.
미국은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문화로 착한 사마리아인 법 조항이 없었으나 키티 제노비스 사건으로 국가 전체는 아니지만 30여 개 주에서 해당 법을 도입했습니다.
지난 9월 1일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의 '착한 사마리아인 법' 제정 조사 결과에 따르면 '위급한 사람을 돕지 않고 지나치는 사람을 처벌할 수 있는 법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이 53.8%를 차지했습니다. 국민 2명 중 1명이 착한 사마리아인 법의 필요성에 공감한 것이죠.
위기에 처한 사람을 돕는다는 것. 단순히 윤리적인 문제로 볼 수도 있겠지만 개인주의가 확산하고 안타까운 상황들 또한 이어지고 있는 현재, 법적 시스템을 마련할 필요가 분명히 있어 보입니다.
joa@fnnews.com 조현아 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