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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재무학회칼럼] 사건사고와 민사 구제

김충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10.18 16:43

수정 2016.10.18 16:43

[한미재무학회칼럼] 사건사고와 민사 구제

태풍 차바로 인한 남부지방의 피해가 크다. 재해가 발생할 때마다 천재 아닌 인재의 측면이 지적된다. 이때 빠지지 않는 건 정부의 예측 및 대비 능력 부족 등 안일한 대응에 대한 비판이다. 당국의 책임이 없지야 않겠지만 우리는 주변에서 발생하는 많은 사건사고의 궁극적 책임을 감독 당국에 돌리는 경향이 강하다.

예컨대 어떤 제품에 하자가 있어 소비자 피해가 발생했다고 하자. 이때 언론에서는 흔히 관리감독 기준의 부재를 원인으로 지적하고, 감독 당국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이 이어진다. 그런데 이 사안에서 직접 잘못한 주체는 다름 아닌 생산업체이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사인(私人) 간의 분쟁이고 민사적으로 해결돼야 하는 문제다. 얼마 전 번지점프 사망사고 때도 업체 과실보다는 관리감독 부실을 지적하는 시각이 많았다. 이 역시 본질상 민사사건으로 피해당사자가 민사소송을 통해 업체로부터 직접 손해를 배상받는 것이 원칙적인 해결방안이다.

한국 사회에서 언제부터 사인 간의 분쟁마저 공적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는지는 분명치 않다. 아마도 유교적 전통, 개발경제시대의 국가주의 등이 기여하지 않았나 싶다. 물론 민사구제는 가해자의 충분한 보상능력을 전제로 하는데, 가난했던 과거에는 가해자인 생산업체조차 영세한 경우가 많아 원활한 손해배상이 사실상 어려웠던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경제수준도 상당한 정도에 이르렀고, 그간의 사법개혁으로 변호사 수도 크게 늘어 민사구제 문턱이 많이 낮아졌다.

민사구제 활성화의 일차적 효과는 물론 피해자에 대한 효과적인 손해배상이지만, 그 효과는 사인 간의 원만한 분쟁해결에 국한되지만은 않는다. 우선 정부의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지금처럼 급변하는 기술환경에서 발생 가능한 모든 상황을 사전에 예상해 관리감독 규정을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집행할 수도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원칙 중심(Principle-based)의 자율규제 정착을 위해 민사구제 활성화가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는 점이다. 국내의 규제체계는 현재 규정 중심(Rule-based)으로 돼있다. 경직적인 후자보다는 유연한 전자의 접근방식으로 전환하자는 인식이 재계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런데 원칙 중심의 자율규제가 제대로 작동되는 것은 현행 규정 중심의 규제체계 운영보다 훨씬 어렵다. 민사구제가 전제되지 않은 자율규제는 사실상 규제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자유시장경제를 표방하는 미국은 사전적인 규제가 별로 없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일례로 우리는 투자자 보호를 위해 적자기업의 상장은 예외적으로 허용하는 반면 미국에서는 적자기업이 나스닥에 상장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는 미국의 투자자 보호가 약해서가 아니라, 관련 정보를 충분히 사전에 공시하도록 하되 오류 또는 허위가 있을 경우 혹독한 수준의 민사적 손해배상을 부과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최근 중국 알리바바가 상장 직후 미국 투자자들로부터 집단소송(Class-action)을 당했다. 그 이유는 대단한 횡령배임이나 비자금 조성 또는 분식회계가 아니다. 상장 당시 유가증권 신고서에 중국 정부로부터 제재를 받은 사실을 명시하지 않았다는 비교적 경미한 사유에서다. 반면 우리나라에선 분양 홍보자료에 '역세권 5분'이 추후 허위과장으로 판명나도 민사구제가 있었다는 말은 잘 들어보지 못했다.
진정한 자율규제와 정부의 시장개입 축소를 위해서는 민사구제의 활성화가 절실한 이유다. 이를 위해서는 사법부의 적극적인 피해자 중심의 판단도 필요하다.
기업 대상 민사소송에서는 대부분 피해자가 약자이고 가해자가 강자이기 때문이다.

김우진 서울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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