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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산책] 최병소 '무제'.. 지우고 지우고, 채우고 채웠다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11.14 17:27

수정 2016.11.14 17:27

[그림산책] 최병소 '무제'.. 지우고 지우고, 채우고 채웠다


대구의 작업실에서 만난 최병소 작가(73)는 신문지에 막 시작한 작업이라면서 작품을 내보였다. 가는 연필 선과 아직 마르지 않은 볼펜 선이 한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작가는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연필과 볼펜으로 신문을 지워왔다. 신문용지, 잡지, 상자 등 소재의 범위는 다양해졌지만 작가의 반복적인 신체 행위만으로 소재를 빼곡히 채운 볼펜과 연필 선들은 여전했다. 수천, 수만 번의 선긋기로 단련한 종이는 볼펜 잉크가 스며들고 흑연이 입혀지면서 단단한 광택이 생기고, 때때로 일정한 방향으로 찢어진 종이들이 일어나 표면을 뒤덮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뿐"이라고 작가는 말했다. 그의 신문 작업은 1970년대 정치사회적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서슬 퍼런 유신체제에 의해 사회의 모든 요소가 억압된 환경에서 당시 작가들은 부조리한 사회와 억압된 자유에 저항하는 예술적인 실험을 지속했다. 작가들은 예술적 욕구를 무시하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사회에 대한 분노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좌절을 마치 쓸모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부조리하고, 지나치게 진지하거나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표현했다. 읽고 싶지 않은 뉴스로 가득한 신문을 그저 지워나간 최병소 작가의 작업 또한 작가로서 할 수 있는 예술적인 저항의 표현 중 하나였다. 작가는 '담배 한 갑' 살 수 있는 돈으로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값어치 없는 재료를 가지고 오롯이 선긋기라는 작가의 신체적 행위로만, 일상과 일상을 이루는 사회를 지우고 또 지우고, 채우고 또 채웠다. 어느덧 그가 지우고 채운 종이는 단순한 종이가 아닌 예술적인 무언가로 향하고 있었다.

넘치는 뉴스에 한정된 지면의 신문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다. 실시간으로 달라지는 신문의 소식만큼 각 기사의 깊이와 방향을 넘어서 기사가 담는 세상의 방향이 서서히 움직이고 있음을 기사를 쓰는 이도, 읽는 이도 모두 알고 있다. 표시도 나지 않는 모든 일상의 반복적인 행위가 차곡차곡 모이고 있다. 세상도 조금씩 조금씩 각도를 달리해 움직이고 있다.

류정화 아라리오뮤지엄 부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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