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마른 나무의 흔적, 우리 삶도 다르지 않다
두꺼운 한지 캔버스에 마른 나무 껍질들이 더덕더덕 화면을 채웠다. 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메말라버린 거죽과 같은 껍질. 처음엔 새순과 함께 연한 모습이었겠지만 뜨거운 햇빛과 칼바람을 맞으며 거칠어지다 결국 떨어져 나왔을 테다. 그리고 바닥으로 떨어져 나온 그 나무의 흔적들은 결국 언젠가는 또 자연 속으로 사라져간다. 시작과 끝. 유한한 인간의 삶 또한 다르지 않음을 느끼게 해주는 이 작품은 서윤희 작가의 2017년작 '기억의 간격-비망(秘望)'이다. 나무가 바랐던 은밀한 바람은 무엇이었을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언젠가는 사라지게 될 기억. 그 찰나를 박제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서윤희 작가는 지난 10년 동안 기억을 새로운 시공간에 새기는 '기억의 간격' 연작에 매진해왔다. 2007년 타국에 두고 온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낸 '1124'를 시작으로 최근까지 서 작가는 각종 자연물과 약재를 우려낸 염료를 주재료로 한지 위에 공간감을 가진 얼룩을 만들고, 인물을 섬세하게 그려넣는 특유의 방식으로 개인의 기억을 일기처럼 작품에 담아냈다.
'기억의 간격' 연작을 통해 작가는 직접 나무, 갈대 등 거친 자연물을 수집해 오랜 시간 끓이거나 한지를 증기에 수십 번 쪄내고 바닷물의 흔적을 내는 등 고된 몸짓을 더한 '신체미술'을 선보여왔다. 자연이 인간을 치유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작가는 이러한 신체미술 작업을 통해 기억 속 그리움이나 상처를 회화 안에서 자연의 흔적으로 녹여 기억을 정화하고 치유하는 의식을 수행한다.
서 작가는 최근 자신의 기억 속 인물을 표상하는 것에서 보다 확장한 우주적인 공간의 신비와 세상을 치유하는 것에 부쩍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작품의 마지막 단계에 그리던 인물들을 생략하고 자연의 흔적만 표상하는 방식을 보이고 있다. 서 작가의 작품은 오는 3월 9일부터 서울 수송동 OCI 미술관에서 직접 만날 수 있다.
jhpark@fnnews.com 박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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