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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 시대] 판사 임용 좌절된 시위전력자, '운명'처럼 노무현을 만나다

조은효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7.05.10 01:00

수정 2017.05.10 01:00

문재인이 걸어온 길
부림사건 인권변호사와의 만남
盧 前대통령 서거에 정치의 길로
18대 대선은 NLL 파동에 좌절
촛불 열망 힘입어 재수끝 靑 입성
참여정부 시절 문재인 대통령. 문 대통령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오른쪽)의 참여정부 시절 민정수석과 시민사회수석, 대통령비서실장을 맡았다.
참여정부 시절 문재인 대통령. 문 대통령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오른쪽)의 참여정부 시절 민정수석과 시민사회수석, 대통령비서실장을 맡았다.

[문재인 대통령 시대] 판사 임용 좌절된 시위전력자, '운명'처럼 노무현을 만나다


신군부가 들어선 지 2년째인 1982년 후반기 어느 날. 부산 부민동 옛 법원.검찰청 부근 허름한 건물. 그날 그는 그곳에서 64년 반평생을 가로지르는 한 사내를 만났다. 사법시험 차석과 사법연수원 차석졸업을 했지만 시위 전력 탓에 판사 임용에 좌절된 직후 소개로 부산의 한 인권변호사와 합동 변호사사무실을 차리지 않겠느냐는 일종의 동업 제의를 받고 찾아간 자리였다. "함께 깨끗한 변호사를 해보자."

■노무현과 문재인

'노무현'. 그 이름 석자는 문재인 대통령의 인생을 관통하는 단어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변호사 사무실을 함께 하기로 한 순간은 '운명'의 시작점이었다.
당시 변호사 노무현은 이미 부림사건(1981년) 변호 등으로 부산.경남지역의 인권변호사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던 터였고, 그 역시 이미 경희대 재학시절 1974년 학내 유신반대 시위 주도와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운동권 핵심으로 구속된 전력이 있었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부산.경남지역의 각종 시국사건을 도맡아 처리하면서 점차 부산.경남지역 민주화운동의 구심점 노릇을 하게 된다. 마침내 1987년 6월 항쟁, 두 사람은 부산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부산국본)를 결성해 가두시위를 전개, 서울보다 더 뜨거웠다는 부산.경남지역 민주화 항쟁의 역사를 새로 쓰기에 이른다.

"사람은 친구를 보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고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입니다."(고 노무현 전 대통령, 2002년 16대 대선 민주당 부산선대본부 출범식)

실제 나이는 여섯살 차이가 나고, 고시도 5년 위 대선배인 노무현 대통령은 그를 가리켜 '친구'라고 했다. 그에 대한 신뢰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기 충분했다. 그리고 세상은 그가 정권의 핵심이 될 것이란 걸 이내 알아차렸다.

[문재인 대통령 시대] 판사 임용 좌절된 시위전력자, '운명'처럼 노무현을 만나다

[문재인 대통령 시대] 판사 임용 좌절된 시위전력자, '운명'처럼 노무현을 만나다


■정치로 이끈 운명

참여정부 당시 초대 민정수석과 시민사회수석, 다시 민정수석, 마지막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내며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불렸지만 그는 이때를 놓고 자신의 자서전 '운명'(2011)에서 이렇게 술회한다. "일탈이었다. 내내 불편했다." 치아 10개를 잃은 것도 이때의 마음고생 탓이었다. 개혁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정권 핵심 실세로 '징발론'에 가까울 정도로 당의 총선 출마(2004년, 2008년) 요구가 잇따랐지만 정치하지 않겠다는 입장은 완고해져만 갔다.

그런 그를 정치의 길로 이끈 건 지난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였다. "대통령은 유서에서 '운명이다'라고 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나야말로 운명이다.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

2012년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일전을 치른 제18대 대선은 이명박정부에 대한 심판론에 독재권력과 민주화운동의 구도가 짜여지면서 손쉽게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것처럼 보였지만 복병이 있었다. 북방한계선(NLL) 대화록 파동이 터진 것이다. 설명하면 할수록 옭아매는 프레임의 덫은 집요했다. 정치인 문재인이 됐지만 권력에 대한 의지가 약하다는 지적도 늘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참여정부 국가인권위원장을 지낸 안경환 서울대 명예교수는 한 칼럼에서 "정치인 문재인의 가장 큰 적은 문재인 자신"이라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 시대] 판사 임용 좌절된 시위전력자, '운명'처럼 노무현을 만나다

■문재인식 정치로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유민아빠 김영오씨와의 동조단식은 그가 비로소 자신다운 방식으로 정치를 해나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였다. 그해 말엔 당대표에 출마해 당선됐고 당 혁신에 착수해 공천 룰을 바꾸고 정당 책임정치를 공언하기에 이르렀다.

지난해 문 대통령은 6·25전쟁 당시 흥남철수 작전(1950년 12월)의 숨은 주역으로 불리는 고 현봉학 박사 동상 제막식에서 이런 말을 했다. "흥남부두 피란민들 가운데 저희 부모님과 누님도 계셨습니다. 현봉학 박사님의 활약이 없었다면 북한 공산 치하를 탈출하고 싶어했던 10만 피란민들이 '우리 대한민국으로 내려올 수 없었을 겁니다." 당시 현장엔 보수 지지자들이 대거 참석해 있었다. 자신의 국가관과 정체성을 '우리 대한민국' 여섯 음절의 단단한 언어로 던진 것이다.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촉발된 촛불집회에서 그는 적폐청산이란 '승자의 언어'를 과감히 던졌고, 1987년 민주항쟁 30주년을 맞은 2017년 변혁의 시대를 이끌 대한민국의 제19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가난한 실향민의 아들이었고 민주화 운동에 나선 인권변호사였으며 고 노무현 대통령의 친구 문재인의 운명과 함께 대한민국의 역사가 다음 장으로 넘어가고 있다.
"광화문에서 국민들과 막걸리 한잔 하고, 주말에는 아내와 같이 시장에 가서 장을 보는 소박한 삶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그의 개혁정치가 개막했다.

ehcho@fnnews.com 조은효 기자

■ 문재인 대통령 프로필

1953 경남 거제 출생 (1953년 1월 24일생·64세)

1968 경남중학교 졸업

1971 경남고등학교 졸업

1972 경희대학교 법대 입학

1975 학생운동으로 서대문 구치소 수감

1978 육군 병장(특전사 제1공수 특전여단)

만기 제대

1980 경희대학교 법대 졸업

1980 제22회 사법시험 합격

1981 김정숙씨와 결혼

1982 노무현 변호사와 합동법률사무소

1985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

1987 부산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

1995 법무법인 부산 설립

2002 노무현 대통령후보 부산 선거대책

본부장

2003 청와대 민정수석

2004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2005 청와대 민정수석

2007 청와대 비서실장

2009 고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의위원회

상임집행위원장

2010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

2011 혁신과 통합 상임공동대표

2012 민주통합당 제18대 대통령 후보

2016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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