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 칼럼] 서생의 이상, 상인의 현실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7.06.12 17:10

수정 2017.06.12 17:10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지론.. 눈은 높게, 발은 땅을 디뎌야.. 文정부가 새겨들어야 할 경구
[곽인찬 칼럼] 서생의 이상, 상인의 현실

김대중 전 대통령 어록이 새삼 눈길을 끈다.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동시에 갖추라는 이야기다. 서생(書生)은 유학자를 말한다. 글만 읽어 세상일에 서툰 선비를 가리키기도 한다. 반면 돈을 만지는 상인(商人)은 이재에 밝다. 현실적이다.
돈만 되면 명분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김대중은 민주화에 목숨을 걸었지만 외환위기가 닥치자 상인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문희상 의원(더불어민주당) 블로그에 따르면 김대중은 1960년대 국회의원 때부터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강조했다.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 2006년 전남대에서 강연할 때 그 뜻을 이렇게 풀었다. "무엇이 옳으냐,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문제의식을 갖고 판단하되, 이를 실천할 때는 마치 장사하는 사람처럼 능숙해야 한다."

지난달 김진표 국정기획자문위원장이 이 말을 다시 꺼냈다. 김 위원장은 위원들에게 문제의식을 갖되 실천 가능한 대안을 제시해 달라고 당부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김진표를 쓴 것은 탁월한 선택이다. 김 위원장은 노무현정부에서 경제.교육 부총리를 지냈다. 참여정부의 잘잘못을 그만큼 뼈저리게 아는 이도 드물다.

노무현정부는 서생적 문제의식으로 가득했다. 나라를 바꿔야 한다는 명분은 좋았으나 상인적 현실감은 부족했다. 유권자들은 그런 노무현정부를 저버렸다. 문재인 대통령도 노무현정부의 약점을 안다. 지난달 추도식에서 문 대통령은 참여정부가 "이상은 높았지만 힘은 부족했다. 현실의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김진표는 이른바 'J노믹스'에 현실감을 불어넣을 적임자로 보인다. 자신이 깊숙이 발을 담근 참여정부가 반면교사다.

그런데 어째 돌아가는 모양새가 묘하다. 새 정부는 최저임금(시급) 1만원 공약을 강행할 태세다. 편의점 알바 시급을 1만원으로 올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점주들은 밤샘 영업을 중단할지 모른다. 인건비 총액을 묶어두려면 그 수밖에 없다. 그러면 밤샘 알바 일자리가 줄어든다. 시장이 돌아가는 생리가 그렇다.

17세기 말 잉글랜드는 창문세(Wind-ow Tax)를 도입했다. 집 창문 수에 따라 세금을 달리 매겼다. 그러자 사람들은 창문을 꼭꼭 막은 집을 지었다. 창문세는 1851년 폐지될 때까지 150년 넘게 이어졌다. 지금도 잉글랜드에선 흉하게 생긴 집들을 볼 수 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노무현정부는 2007년 비정규직보호법을 시행했다. 2년 비정규직으로 일하면 반드시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는 게 주 내용이다. 그 뒤 어떤 일이 벌어졌나. 비정규직은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다. 기업들은 2년을 꽉 채우기 전에 해고를 되풀이하는 편법을 썼다. 편법을 옹호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시장이 돌아가는 생리가 그렇다는 얘기다.

국정기획자문위가 미래창조과학부에 통신료 인하안을 내놓으라고 채근한다. 참 난감하다. 이동통신 3사는 100% 사기업이다. 정부가 이래라저래라 강요할 처지가 못 된다. 정권이 바뀌어도 기업을 쥐고 흔들려는 버릇은 여전하다.

옛날 중국 양나라에 포정이란 백정이 살았다. 소를 잡는 솜씨가 뛰어났다. 수천마리를 잡아도 칼날은 늘 방금 숫돌에 간 것처럼 생생했다. 결대로 뼈와 살을 발랐기 때문이다.
포정해우란 고사가 여기서 나왔다. 살우(殺牛)가 아니라 해우(解牛)라 했다.
문재인정부의 서생적 문제의식은 충분하다. 과연 돈을 만지는 상인처럼, 소를 풀어헤치는 포정처럼 능수능란한 솜씨를 뽐낼 수 있을까.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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