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기자수첩

[기자수첩] 채용청탁과 현실의 ‘엄석대’들

송주용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7.11.09 17:10

수정 2017.11.09 17:10

[기자수첩] 채용청탁과 현실의 ‘엄석대’들

1987년 발표된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권력의 교묘함과 끈질김을 잘 보여준다.

학교라는 공간으로 축소된 사회는 잔인하고 냉혹하다. 특히 학급 전체를 이끌고 있는 '실세' 엄석대는 포악하지만 영민하다. 엄석대는 자신의 힘을 사용할 줄 아는 인물이다. 수많은 의미가 담긴 "야, 이거 좋은데?"라는 말 한마디와 자신의 측근들에게 보내는 짧은 '눈짓'으로 학급을 통제한다.

그런 엄석대에게 학급 구성원들은 '알아서' 긴다.
그들은 엄석대가 무서웠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에게 잘 보임으로써 그의 권력을 나누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철옹성 같던 엄석대의 왕국이 무너졌을 때 학급 친구들은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매타작을 당한다. 부당한 권력에 대항하지 못한 죄와 부당한 권력에 빌붙어 영화를 누린 죄가 크기 때문이다. 그들은 비판 받아 마땅했다. 어찌 보면 그들이 엄석대 왕국을 지키는 '첨병'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시선을 2017년 대한민국으로 돌려본다. 현실 속 엄석대가 있다. 수많은 '채용비리 청탁자'들이다.

지난 2015년 중소기업진흥공단은 A의원실의 채용청탁을 들어준 대가로 당시 조직의 수장인 박철규 전 중진공 이사장이 구속되는 곤욕을 겪었다. 조직은 쑥대밭이 됐고, 중진공의 이미지는 실추됐다.

박 전 이사장은 중진공 신입 직원 채용과정에서 A의원실 인턴 출신 황모씨의 서류를 조작해 부정 채용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금융감독원은 B 전 의원의 채용비리에 연루돼 김수일 부원장이 구속되는 수모를 겪었다. B 전 의원의 채용 청탁을 돕기 위해 내부규정을 바꾸거나 신설한 혐의다.

언뜻 보면 채용비리에 대한 엄중한 판결로 공정한 사회의 첫걸음이 시작된 듯 보인다. 그러나 의문점은 남는다. 채용비리로 형을 확정받은 사람 중에 '엄석대'는 없기 때문이다. 소설 속 상황을 놓고 보면 권력자 엄석대는 살아남고, 그에게 '알아서 긴' 학급 아이들만 법의 심판을 받고 있는 꼴이다.

각종 채용비리 문제에서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엄석대 왕국의 주인은 엄석대라는 것이다.
그의 권력에 굴복하거나 빌붙었던 학급 친구들의 죄가 아무리 크더라도 결국 몸통은 엄석대다. 엄석대의 왕국이 무너졌을 때 엄석대만 처벌의 칼날을 피했다면 소설은 결코 정의를 이야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수많은 채용비리 재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juyong@fnnews.com 송주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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