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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언대] 이석우 시장 “안양 서용보-남양주 정약용은 질긴 악연”

강근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02.18 10:45

수정 2018.02.18 10:45

이석우 남양주시장. 사진제공=남양주시
이석우 남양주시장. 사진제공=남양주시


16세의 다산 정약용은 이익 선생님의 <성호집>을 읽고 실학자가 되기로 다짐했지요. 사람의 일생이 이처럼 좋은 인연만 맺어진다면 얼마나 행복하고 아름다울까요? 그러나 인생은 악연으로도 맺어집니다. 바로 정약용과 서용보의 질긴 악연이 그 예이지요.

안양의 8가지 구경거리 중에서 안양 4경인 만안교(萬安橋)에 정약용과 서용보의 악연이 깃들어 있답니다. 만안교는 만년 동안 편안하게 다리를 건너라고 정조가 1795년 축조했습니다. 1794년 경기도관찰사였던 서용보가 최초로 만안교 건설을 추진했는데, 1795년 만안교를 완성한 사람은 경기도관찰사 서유방입니다.

서용보는 왜 만안교에 손을 떼고 경기도관찰사직까지 떠나야 했을까요. 바로 정약용 때문이었습니다. 정약용이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서용보의 비행을 정조에게 보고하였고, 서용보는 경기도 관찰사직에서 해임되었지요. 당시 정조에게 신임 받으며 잘 나가던 서용보는 이 일로 인하여 앙심을 품고 평생 정약용에게 앙갚음을 합니다.


1801년 2월 천주교 대박해 사건인 신유사옥 때 정조는 정약용을 무죄로 석방하고자 하였으나 서용보의 반대로 포항 장기로 유배를 보내지요. 10월에는 황서영 백서 사건에 엮어서 강진으로 유배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1803년에 정순왕후가 정약용을 석방할 것을 특명으로 내립니다. 당시 우의정이던 서용보가 끝까지 반대하여 결국 무산이 됩니다. 정약용은 1818년에야 비로소 유배지에서 풀려났지요.

1819년 겨울 조정에서 정약용을 기용하려고 논의를 마쳤으나 영의정이던 서용보가 극력 저지하였지요. 김언종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는 정약용과 서용보의 질긴 악연을 ‘정약용의 슬로라이프’로 풀어냈습니다. 2015년 10월 남양주 슬로라이프국제대회 컨퍼런스에서 “서용보야말로 정약용이 일생 동안 슬로라이프 생활을 하도록 기여한 인물”이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서용보가 아니었다면 정약용은 훌륭한 관리(공무원)는 되었을지언정 500여권의 방대한 저술은 하지 못했을 거라는 거지요. <목민심서>, <흠흠심서>, <경제유표> 등 저술은 세상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만안교를 기념하여 매년 10월 개최하는 안양시민의 날에 남양주를 초청하면 적극 참석하겠습니다.
매년 9월, 10월 정약용을 기념하는 남양주의 다산문화재에 안양시민 여러분을 초청하겠습니다.

안양시의 만안교로 시민이 만년 동안 편하게 건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정약용의 애민정신으로 천년 만년 행복한 세상을 만들면 좋겠습니다.

이석우 남양주시장
kkjoo0912@fnnews.com 강근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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