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안전 믿었던 아파트 단지가 교통사고 사각지대?..도로교통법의 허점

이혁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03.10 09:13

수정 2018.03.14 16:16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어야 도로.. “아파트 단지 횡단보도는 사유지로 분류돼 도로 아냐”
아파트 단지에서 교통사고 발생해도 교통사고처리 특례법 12대 중과실에서 제외
12대 중과실은 보험 가입 여부, 피해자 합의와 관계없이 가해자 처벌 가능 
해외는 속도 제한·과속방지턱 등 규정 만들고 일반 도로와 똑같이 법 적용
아파트 단지 내 횡단보도는 도로가 아니기 때문에 교통사고가 발생해도 교통사고처리 특례법 12대 중과실에서 제외된다. (이 사진은 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 /사진=이혁 기자
아파트 단지 내 횡단보도는 도로가 아니기 때문에 교통사고가 발생해도 교통사고처리 특례법 12대 중과실에서 제외된다. (이 사진은 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 /사진=이혁 기자

“모녀가 장을 보고 아파트 단지 내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차에 치였습니다. 꼬리뼈가 골절되는 중상에도 엄마는 6살 딸에게 심폐소생술을 했지만 다시는 그 작은 두 손을 잡지 못하게 됐습니다. 가해자는 같은 단지 내 살고 있는 주민으로 안면이 있으며 대화도 나누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가해자는 사고 후 여행을 떠났고, 첫 재판 때 블랙박스 영상을 보니 사람을 치고도 차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또한, 1차 판결 후 변호사를 선임하고 죗값을 받지 않으려 하고 있으며 잘못된 법을 악용하며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있습니다. 자식을 가진 부모님의 마음으로 조금씩 힘을 보태 가해자에게 엄중한 처벌이 내려지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지난해 10월 대전의 한 아파트 단지 내 횡단보도에서 발생한 교통사고에 대해 피해자 부모가 청와대 국민청원에 남긴 글이다. 지난 1월 14일 게재돼 한 달 만에 21만9395명이 청원에 참여해 정부가 공식적인 입장을 밝힐 10번째 청원이 됐다.

전국민의 절반 가량이 아파트에 거주하는 한국적 주거상황에서 아파트 단지 내 교통사고에 대한 처벌이 터무니없이 가볍다는게 청원의 핵심이다. 가해자는 1차 재판에서 금고 2년 형의 처벌을 받았다. 아이엄마는 중상, 6살 딸은 세상을 떠났는데 처벌 수위가 약해 아파트 단지내 교통사고에 대한 제도개선을 요구하는 주장이 확산되고 있다.

■안전한 집 앞이 교통사고 사각지대? 아파트 단지 도로는 안전시설 의무도 없고 사고 처벌도 솜방망이
11일 경찰등 관련기관에 따르면 현행 도로교통법은 아파트 단지 내 횡단보도를 도로가 아닌 사유지로 분류한다. 따라서 교통사고가 발생해도 교통사고처리 특례법 12대 중과실로 처벌할 수 없다. 12대 중과실은 운전자의 과실이 중하기 때문에 종합보험 가입 여부, 피해자 합의와 관계없이 처벌을 받는데, 국민청원 사례가 된 대전 아파트 단지 교통사고는 횡단보도 보행자 보호 의무를 위반했지만 도로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12대 중과실로 처벌할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서울 대형 아파트단지에 사는 주부 김모씨는 "요즘 아파트들은 자동차뿐 아니라 버스가 다니는 곳도 많고 아파트 단지안에는 고령자, 어린이들이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주의를 덜 기울이는 경우가 특히 많아 가벼운 사고도 인명 피해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며 "아파트 단지는 도로가 아니기 때문에 속도 제한, 보호구역 지정, 안전시설물 설치 의무도 없고 처벌도 약해 집 앞 가장 안전한 장소로 인식되는 아파트 단지 도로가 오히려 교통사고의 법적 사각지대에 있는 셈"이라고 제도적 개선을 요구했다.

경찰청 조우종 교통기획계장은 “아파트 단지 횡단보도는 개인들이 필요에 의해 만든 도로이기 때문에 도로교통법이 적용되지 않는다”며 “도로교통법에 적용되는 도로는 도로법에 따른 도로, 유료 도로법에 따른 도로, 농어촌 정비법에 따른 농어촌 도로,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돼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아파트 단지 횡단보도를 도로로 인정하면 관리책임이 생겨 문제가 발생한다고 현실을 설명했다. 조 계장은 “가령 주차장이 없어 개구리 주차를 하게 되면 주차위반이 되는데 집 앞 마당에서까지 일반 도로와 같은 규정을 적용할 경우 주민들의 불편이 늘어날 수 있다"고 밝혔다.

아파트 입구에 설치되어 있는 차단기. 대법원은 아파트 단지 내 차단기가 설치되어 있고, 통행 제한이 있으면 도로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 사진은 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 /사진=이혁 기자
아파트 입구에 설치되어 있는 차단기. 대법원은 아파트 단지 내 차단기가 설치되어 있고, 통행 제한이 있으면 도로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 사진은 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 /사진=이혁 기자

■해외선 주거지역내 속도 제한·과속방지턱 등 규정 만들고 안전시설 설치
그러나 해외에서는 주거지역내 교통안전에 대해 일반도로보다 더 깐깐하게 챙기고 있는게 추세다. 독일은 아파트 단지 등 주거지역을 보호구역으로 지정해 ‘템포 30’을 운영한다. 자동차 주행 속도를 최고 30㎞/h로 제한하고, 과속방지턱, CCTV 등 감속 시설과 각종 안전시설을 설치한다. 속도 제한이 10㎞/h 이하인 지역도 있다.

프랑스 파리는 ‘신호등 앞 일시정지’ 제도가 있으며 시내의 모든 사거리에서 차량 속도를 30㎞/h로 제한했다. 보행자, 자전거 이용자, 자동차 등 같은 도로를 사용하는 구역을 ‘교차 통행 구역’으로 지정해 최고 20㎞/h로 제한한다. 운전자는 통행을 보행자들과 자전거 이용자들에게 양보해야 하며, 취약한 도로 이용자들을 대비해서 방어 운전을 해야 한다.

미국은 스쿨존 범위를 학교 근처 500m로 규정하고 최고 속도는 30㎞/h로 제한했다. 학교 앞에 스쿨버스가 멈추면 같은 방향의 차량뿐 아니라 반대 방향에서 오는 차량도 모두 정지해야 한다. 또한, 주거시설 내 도로는 일반 도로와 똑같이 도로교통법의 적용을 받는다.


강경우 한양대 교통물류공학과 교수는 “아파트 단지 내 횡단보도를 도로로 인정 안 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요즘 아파트는 버스, 트럭 등 자동차들이 많이 다니고 몇 천 세대가 사는 곳도 있는 등 공공 주택이기 때문에 사유지로 보는 것은 애매하다”고 말했다.
또 “몇 세대 이상의 공공주택 단지내 도로는 일반도로로 인정한다는 법을 개정하거나, 어느 정도 규모 이상은 도로교통법에 명시된 과속방지턱 설치 기준이나 경찰청 설계 지침에 맞게 조례를 개정하는 것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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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k7179@fnnews.com 이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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