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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보수주의를, 절망에서 끄집어내다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04.11 17:41

수정 2018.04.11 17:41

보수의 정신 러셀 커크/지식노마드
‘바보들의 무리’라며 조롱받던 1950년대 미국 보수주의자들
러셀 커크의 ‘보수의 정신’ 출간 이후 쇠락의 길에서 부활의 길로 대역전
'보수의 정신' 저자 러셀 커크
'보수의 정신' 저자 러셀 커크


"이 책은 우리 문명의 정치적이고 정신적이며 지적인 전통을 지켜내려는 우리의 노력에 바치는 나의 헌신이다."

저자 러셀 커크의 단언대로 한 때 '바보들의 무리'로 조롱받던 미국 보수주의가 부활할 수 있었던 사상적 기초가 된 책이다. 프랑스혁명 직후의 에드먼드 버크(1729~1797)에서 조지 산타야나(1863~1952), 20세기 T S 엘리엇(1888~1965)까지 중요한 보수주의자들의 사상을 파고들어 20세기 불후의 고전으로 불린다.

현대 정치의 흐름이 바뀌었다고 평가될 만큼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킨 이 책이 던지는 화두는 '보수주의란 과연 무엇인가'다. 보수주의란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835년 영국이지만, 보수와 진보는 사실 이름만 없었을 뿐 인류의 역사와 언제나 함께해 왔다.

경험과 안정을 중시하는 이들과 새로움과 변화를 지지하는 이들과의 갈등은 항상 존재했었을테니 말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보수주의'라는 이름이 생겨났을 당시 보수에 대한 이미지는 최악이었다. 1950년 초반까지 존 스튜어트 밀에 의해 '바보들의 무리'라고 불렸던 보수주의자들은 패퇴를 거듭했다. '자유론'으로 잘 알려진 영국의 사상가 밀은 "모든 보수주의자들이 어리석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지만, 대부분의 어리석은 사람들은 보수주의자라는 것은 사실이다"라는 말로 보수주의를 끌어내렸다.

미국 보수주의를, 절망에서 끄집어내다


저자가 처음 생각했던 책의 제목이 '보수의 패퇴'였던 것도 이러한 시대적 배경 때문이다. 자유주의가 유일한 시대정신으로 위세를 떨치던 당시에 이 책의 출간이 던진 파장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저자가 이 책으로 당시 사회에 던진 메시지는 단 하나였다. "보수주의자는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며, 미국은 자유주의 나라라기 보다는 건국부터 보수의 나라이기도 하다"는 그것이다.

절망 속에 있던 미국의 보수 진영은 이 책 한 권으로 정세를 뒤바꿨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수주의 사상의 핵심 가치를 정립한 이 책은 오늘날까지도 보수주의 사상의 가장 중요한 준거 중 하나로 인용되고 있다.

보수 진영에서는 더 없는 찬사를 보내는 책이지만, 이 책으로 저자는 당시 자유주의가 장악하다시피한 미국 뉴욕에서는 축출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책의 영향력은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레이건 대통령은 훗날 이 책으로 인해 미국의 보수적 부활이 가능했다고 평했고, 닉슨 대통령은 '보수의 정신'을 읽은 후 팬이 되었다고 저자에게 직접 말하기도 했다.

TS 엘리엇
TS 엘리엇


'버크에서 엘리엇까지'라는 부제가 말하듯 저자인 러셀 커크는 프랑스혁명에서부터 1950년대까지 보수주의의 사상사를 다뤘다. 사회 발전을 위한 개혁이 사회 그 자체를 태워버리는 대화재가 될 수 있음을 간파한 버크, 다양성이라는 미덕 아래 획일화된 평범함이라는 악을 품은 민주주의의 모순을 읽어낸 토크빌, 추상적 자유는 방종이기에 법 앞에서의 규범적 자유를 옹호한 존 애덤스 등 이 책은 자유주의가 초래할 위험과 폐해를 통찰한 보수주의자들의 위대한 상상력으로 가득 차 있다.

저자는 보수주의를 몇 마디의 문장으로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보수주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이며 사회의 질서를 바라보는 방법'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역사, 인간, 사회, 국가, 민주주의, 자유, 평등, 교육 등 다양한 주제에서 나타난 보수주의자들의 사상을 통해 보수주의가 인류의 정신적이고 지적인 전통의 계승이자 '영원한 것들'을 지키려는 노력이며, 사회의 발전을 위한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고뇌의 산물임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올바른 보수에 대한 의문점이 커지는 현재,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하는 책이다. 스스로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물론, 보수주의를 비판하는 사람 모두에게 진정한 보수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1953년에 출간된 이 책이 국내 출간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아시아 지역에서 번역 출판되는 것도 우리나라가 최초다. yjjoe@fnnews.com 조윤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