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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 제주의 포구①] 제주인의 삶 그 자체이자 역사의 시원

좌승훈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05.07 14:41

수정 2018.05.25 00:42

거친 바람·파도에 맞선 제주선민들의 생업의 터전 
코지·여 지형물 활용…안캐·중캐·밖캐로 나눠 축조
갯당·원담·도대불·고기밭…제주 어로문화유적 빼곡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새성창'포구. /사진=제주관광공사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새성창'포구. /사진=제주관광공사

[제주=좌승훈기자] 제주사람들은 바다와 더불어 살아왔다. 제주의 선민들은 갈아먹을 땅이 척박하여 고기잡이를 위해 바닷가 마을마다 포구(浦口)를 만들었다.

그러나 제주는 화산섬이어서 천혜의 조건을 갖춘 포구가 드물었다. 화산이 터지면서 뿜어 나온 용암은 바닷가로 흘러들어 죄다 크고 단단한 돌밭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제주의 선민들은 돌덩이를 일일이 등짐을 져 나르거나, ‘빌레’를 정과 망치로 깨 포구를 축조해야 했다. 숭숭 구멍이 난 화산 석은 제주 사람들의 땀방울로 얼룩졌고, 거친 바다와 싸워야 하는 숙명적인 생활이 함께 침잠해 들어갔다.


1960년대 말 한림읍 귀덕1리 포구를 보수하기 위해 아낙들이 맨손으로 돌은 나르는 장면이다. 노력봉사에 동원된 마을 사람들은 제각각 제 힘에 맞게 맨손으로 돌을 등에 지거나 허리춤에 끼거나 안아 나르고 있다. /출처='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1'
1960년대 말 한림읍 귀덕1리 포구를 보수하기 위해 아낙들이 맨손으로 돌은 나르는 장면이다. 노력봉사에 동원된 마을 사람들은 제각각 제 힘에 맞게 맨손으로 돌을 등에 지거나 허리춤에 끼거나 안아 나르고 있다. /출처='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1'

숱한 세월동안 깎이고 깎인 돌덩이를 있는 그대로 들어다가 몇 겹으로 쌓아 올려 만들어진 제주의 포구는 제주 사람들의 삶 그 자체요, 역사의 시원(始原)이었다.

제주의 선민들은 포구를 만들면서 무작정 아무렇게나 힘을 쏟았던 게 아니다. 돌덩이를 쌓더라도, 주변의 ‘여’・‘코지(곶)’ 와 같은 자연 지형 물을 최대한 활용했다. ‘여’는 수중 암초다. 들물 때는 물속에 잠겨 보이지 않다가도, 썰물 때면 모습을 드러낸다. 방파제를 쌓기에 안성맞춤이다.

[fn+ 제주의 포구①] 제주인의 삶 그 자체이자 역사의 시원

제주시 한림읍 귀덕1리 '큰개' 포구.
제주시 한림읍 귀덕1리 '큰개' 포구.

제주시 외도동 ‘너븐여개’와 애월읍 금성리 ‘모슬개’는 ‘닻왓’ ‘서치동산’ ‘포구왓’ ‘솔대’(이상 너븐여개)와 ‘개롱이왓’ ‘창남밭’ ‘조팟동산’ ‘배똥밭’ ‘코생이왓’(이상 모슬개) 등의 포구 주변 지세가 선형(船形) 혹은 주형(舟形)이다.

포구가 들어설 수밖에 없는 지형이고, 고기잡이가 숙명인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포구에는 살아남기 위한 온갖 지혜들이 짜 모아졌다. 대표적인 게 바닷길이다. 제주의 선민들은 어선이 좌초되는 것을 막기 위해 바다 속에 포구로 드나드는 길을 만들었다. 수중 암초로 인해 썰물 때는 자칫 좌초 사고가 날 수 있기 때문에, 바닷길은 포구 사람들의 생명줄과도 같았다.

포구는 실용적으로도 잘 설계되어 있다. 대개 안캐(內浦), 중캐(中浦), 밖캐(外浦)로 나눠 축조됐다. 이는 어선들이 입・출항 순서 별로 정박토록 함으로써, 드나듦의 혼잡함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제주 전통어로시설물인 원담(갯담). 제주시 애월읍 하귀1리에 있는 ‘새원’이다. 원담은 해안 지형과 조차(潮差)를 이용해 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돌을 쌓아 만든 담을 뜻한다.
제주 전통어로시설물인 원담(갯담). 제주시 애월읍 하귀1리에 있는 ‘새원’이다. 원담은 해안 지형과 조차(潮差)를 이용해 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돌을 쌓아 만든 담을 뜻한다.

제주도내 포구들은 대부분 규모가 작고 수심이 낮아 썰물 때면 ‘걸석’현상이 자주 나타났다. ‘걸석’은 썰물 때면, 포구에 정박 중인 배 밑바닥이 해면에 닿아 기우는 현상을 말한다. ‘튼석’은 그 반대다.

이에 따라 비교적 수심이 깊은 ‘밖캐’는 곧 출항을 앞둔 어선들이, ‘안캐’는 조업을 미루거나 정비를 요하는 어선들이 정박했다. 또 포구에 배를 댈 때에는 뱃머리나 배 밑창이 파손되지 않도록 ‘개낭’을 설치했다. ‘개낭’은 선박 파손을 방지하기위해 배 대는 곳에 걸어놓는 지금의 '폐타이어'와 같은 역할을 했다.

제주의 포구는 바다와 더불어 살아온 제주 선민들의 삶의 흔적들이 잘 응축된 곳이다. 포구 주변에는 으레 ‘지방여’라는 지형이 있다.

‘지방‘이란 종잇조각에 지방문을 써서 만든 신주(神主)다. 보재기(어부를 이르는 제주어)들에게는 포구가 집이나 다름없는 보금자리였다. 또 포구에는 풍어와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갯당‘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마을의 액운을 막으려고 방사탑(防邪塔)도 만들었다.

제주 동녘 바다가 선사하는 푸른 생명력, 성산포수협 위판장. /사진=제주관광공사
제주 동녘 바다가 선사하는 푸른 생명력, 성산포수협 위판장. /사진=제주관광공사

이 뿐 만 아니다. 포구에는 ‘원담(갯담)’, ‘도대불’, ‘불턱’, ‘용천수 터’. ‘바닷길’, ‘고기밭’, ‘소금밭’, ‘방사탑’ 등과 같은 제주 어로문화 유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불턱’은 해녀들이 물질을 하면서 옷을 갈아입거나, 불을 쬐며 쉬는 곳이다. ‘원담’은 바닷가에 밀물과 썰물의 차를 이용하여 고기를 잡을 수 있게 쌓아 만든 돌담이다. ‘원’ 또는 ‘개’라고 한다. 돌로 만든 그물인 셈이다.

‘도대불’은 ‘등명대(燈明臺)’라고도 한다. 밤에 배들이 포구를 드나들 때, 무사히 운항할 수 있도록 주민들이 만든 것으로 지금의 등대와 같은 역할을 했다.

제주시 용담2동 '다끈개' 포구
제주시 용담2동 '다끈개' 포구

지금 남아 있는 ‘도대불’은 석축물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이전에는 소나무나 삼나무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다 유리관과 쟁반 모양의 갓을 씌워 각지불(등잔불)을 켰다. 2홉 소주 한 병 가량의의 등유만 있으면 밤새 불을 훤히 밝힐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불을 켜고 끄는 일이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어서 사람들은 공동으로 돈을 각출해 ‘놉(품팔이꾼)’을 썼다.

소금밭은 염전이다. 바닷가 암반이나 모래밭을 이용하여 소금을 생산하던 곳이다. 지금도 포구 주변에는 염포(鹽浦), 염전동(鹽田洞), 염전보(鹽田堡)와 같은 지명이 남아 있다. 대표적인 곳으로는 애월읍 구엄리 ‘철무지개’에 있는 ‘소금빌레’다. 돌 염전으로서, 바닷가 파식대(波蝕臺)를 이용해 바닷물을 직접 증발시켜 소금을 만들던 곳이다.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자구내' 포구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자구내' 포구

밭은 육지에만 있는 게 아니다. 자리돔이 많이 잡히면 ‘자리밭’, 미역이 많이 나면 ‘메역밭’이라고 했다. 한경면 두모리 포구 ‘코지개’ 인근에는 ‘벤자리 왕’이라는 고기밭이 있다. 벤자리가 엄청나게 잡혔던 모양이다.

애월읍 고내리 ‘고내성창’ 앞 ‘요강터’는 바닥이 요강처럼 움푹 패여 있다.
밀물에 들어온 고기가 영락없이 요강 터에 갇히고 만다는 천혜의 황금어장이었다.

‘고내성창’이 고려 원종 11년 무렵(1230)에 축조됐음에도 포구의 규모가 열악했던 것은 굳이 멀리 나가지 않더라도, 작은 배로도 바로 눈앞에 펼쳐진 ‘요강터’에서 얼마든지 고기를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5 끝]

[편집자 주 : 제주의 포구는 5회로 나눠 연재됩니다.]

jpen21@fnnews.com 좌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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