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저·헬스 레저

[fn+ 제주의 포구②] 고난의 삭임 위에 떠있는 생업의 터전

좌승훈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05.12 03:13

수정 2018.05.25 00:42

삶의 뿌리를 내리기 위해 끝없이 싸워온 자존의 바다
제주 전통 등대인 도대불이 있고 용천수가 나는 제주시 용담2동 다끈개. /사진=제주관광공사
제주 전통 등대인 도대불이 있고 용천수가 나는 제주시 용담2동 다끈개. /사진=제주관광공사

[제주=좌승훈기자] 제주의 포구에는 제주 선민들의 삶의 고난이 소금의 알갱이처럼 하얗게 말라붙어 있다. 제주시 용담 2동 ‘다끈개(닦은개)’는 개발바람에 밀려 삶의 터전을 떠나야 했던 실향민들의 비원이 남아있다.

포구는 바닷가 너럭바위인 ‘넙빌레’를 일일이 정과 망치로 깨서 만들었다. 그래서 ‘닦은개’다. 마을 이름도 ‘닥그네(수근동)’다. 그러나 이 마을 170여가구 700여 주민들은 제주국제공항 확장과 항공기 소음에 시달리다, 결국 통째로 삶의 터전을 떠나야 했다.
철거민의 한(恨)은 포구 옆 용천수인 ‘양원수(養源水)’ 터에 유적비로 남아 있다.

성상읍 온평리에 있는 제주 전통 등대인 도대불. /사진=제주관광공사
성상읍 온평리에 있는 제주 전통 등대인 도대불. /사진=제주관광공사

■ 개발 바람에 밀려 잃어버린 마을…다끈개, 실향민의 비원 가득

“우리는 이제 생활의 보금자리를 각각 사방으로 옮겼으나, 어버이의 삶의 터전이었던 고향 땅을 후손에게까지 영원히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양원수가 흘렀던 ‘물동산’에 애향의 동산을 만들고 … 언젠가는 다시 향토로 돌아갈 것이다”

‘다끈개’ 서쪽 도두동의 옛 포구는 ‘돈지개’와 ‘고븐개’다. 포구 동쪽에는 도두봉이 우뚝 서 있다. 아마 제주도내 포구 중 동풍(東風)을 막는 데는 최적지였을 게다.

또한 ‘돈지개’의 ‘송곳여’ 지경에는 ‘만리장성’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현재 도두항 남방파제의 근간이 되고 있는 이곳은 1960년대에 마을사람들이 거친 풍파를 막기 위해 200m 가량의 방파제를 쌓았던 곳이다. 당시에는 그 흔한 손수레도 없었다. '돌챙이(석수)‘가 돌을 깨면 일일이 등짐을 져 날랐다고 하니, 그 고난의 삭임이 ’만리장성‘이라고 할 만 하다.

제주시 삼양3동 ‘버렁’포구는 한자로 '벌랑(伐浪‘)이라고 했다. 포구를 만들면서 얼마나 단단하게 돌을 쌓았는지, ’거친 파도를 잠재웠다‘고 한다.

■ 월령축항, 4·3의 아픔 ‘파편처럼’…‘군냉이’ ‘막숙’ 군사 요충지

한림읍 월령리 ‘월령축항(築港)’에는 ‘4·3이란 통곡의 기억이 파편처럼 널려 있다. 포구는 1948년에 축조됐다. 당시 김병옥 구장(區長)은 마을 젊은이들을 잡아놓기 위해 포구를 만들었다. 난리에 휩쓸려 마을 공동체가 무너지는 것을 막고자 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당시 ’쇠눕은 빌레‘를 일일이 정으로 쪼아가며 포구를 만들었다. 얼마나 일이 고됐던지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바다로 쏠렸으며, 김 구장의 판단은 적중했다.

[fn+ 제주의 포구②] 고난의 삭임 위에 떠있는 생업의 터전

서귀포시 법환포구 '막숙'과 ''막수'에서 본 범섬. /사진=제주관광공사
서귀포시 법환포구 '막숙'과 ''막수'에서 본 범섬. /사진=제주관광공사

질곡의 역사는 제주시 애월읍 동귀리 ‘군냉이’와 서귀포시 법환동 ‘막숙(幕宿)’에도 남아 있다.

‘군냉이’는 항파두리로 가는 길목에 있다. 흔히 군항(軍港)이라고도 한다. 고려 원종 14년(1273), 삼별초 김통정이 려·몽 연합군에 맞서 항파두리 성을 축조하고 이곳과 인접한 동귀리에 전초기지와 군항을 만든 데서 유래됐다.

‘막숙’은 ‘변방 새(塞)’를 써 ‘새포(塞浦’라고도 한다. 군사 요충지였다. 여말(麗末) 최영 장군이 ‘목호(牧胡)의 난’을 진압했던 최후의 격전장이다. 막숙 인근 ‘배연줄이’는 목호 잔당들이 범섬으로 도주하자, 이를 완전히 소탕하기 하기 위해 뗏목을 만들어 범섬과 연결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제주올레 6코스에 있는 서귀포시 보목포구. /사진=제주관광공사
제주올레 6코스에 있는 서귀포시 보목포구. /사진=제주관광공사

■ 같은 날 제삿집 19곳…‘이승의 한 끝’이자 ‘이어도 가는 길목’


남원읍 위미1리 포구, ‘앞개’는 ‘이승의 한 끝’이자 ‘이어도로 가는 길목’이다. 위미리 사람들은 해마다 음력 칠월 초닷샛날이면, 이승을 뜬 이 마을 보재기(어부를 이르는 제주어)들에 대한 애도의 뜻과 해신(海神)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다 일을 그만둔다.

지금으로부터 80여 년 전 고기잡이 나갔던 배들이 포구를 눈앞에 두고 ‘돗갱이’(돌풍)을 만나 침몰, 모두 익사하면서 위미리 관내 제삿집이 19군데나 된다고 한다. 하지만 어쩌랴. 이곳에서 낳고 자란 시인 오승철은 “누가 떠나고/ 누가 돌아 왔는가/ 아버님, 할아버님/ 다 뜨시고 빈 마을/ 앞개는 이 승의 한 끝/ 이어도 가는 浦口였네”라며 슬픔에서 비롯된 억울함과 고단함을 끌어안고 다시 일어났다. 그 앞에는 지금도 가열 찬 생업의 터전이 일렁이고 있다.

조천읍 함덕리와 신흥리 경계에 있는 ‘희룡이 성창’은 일제 강점기 때, 한희룡이 ‘다실여’와 ‘보리여’를 근간으로 제주 최대의 포구를 축조하려던 곳이다.

이곳은 함덕리 관내에서 수심이 가장 깊었을 뿐 만 아니라, 신흥리 지경의 ‘도릿개’와 연결한다면, 당시 포구로서는 상당한 규모에 이를 것으로 봤다.

그러나 한희룡은 1919년 조천 만세운동 준비 모임에 참여하고 함덕리 독립 만세사건을 주도하면서, 일제의 압력과 사업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끝내 그의 꿈도 물거품이 되고 만다.

제주시 한림수협 위판장. 어둠의 치맛자락이 넓게 드리워질수록 포구는 도심의 한낮에 가깝다.
제주시 한림수협 위판장. 어둠의 치맛자락이 넓게 드리워질수록 포구는 도심의 한낮에 가깝다.

■ 하도리 ‘한개창’ 바람 타는 섬 주 무대, 동부지역 교역의 중심지

구좌읍 하도리 ‘한개창’은 제주 작가 현기영의 소설, ‘바람 타는 섬’의 주 무대가 되는 곳이다. ‘바람 타는 섬’은 세화 잠녀 투쟁을 토대로 한 시대의 격랑을 헤쳐 나간 잠녀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바람 타는 섬‘의 모든 이야기는 1932년 1월 12일과 24일의 세화장터로 집결된다. 당시 세화장터는 김녕・평대・종달・시흥・오조리 마을은 물론, 멀리 우도 주민들도 10여척의 돛배를 타고 장에 나와 생활필수품을 사고팔던 곳으로서, 인근 ’한개창‘은 제주 동부지역 교역 중심지로 자리매김 됐다.

당시 이 곳, 정어리 장수들은 함경도 청진・원산까지 나가 정어리를 값싸게 사들인 후, 이곳에서 팔아 큰 이득을 봤고, 포구 주변 곳곳에 기와집을 지었다고 한다.

평대리 사람인 김보임은 ’한개창‘의 마지막 옹기장수로 기억된다.
그는 돛이 3개인 3대선을 타고 전남 목포・완도 등지를 드나들며 장사를 했다. 3대선은 크기가 지금의 10톤 어선에 해당된다.
[2/5 끝]

[편집자 주 : 제주의 포구는 5회로 나눠 연재됩니다.]

jpen21@fnnews.com 좌승훈 기자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