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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 제주의 포구④] “여기 오면 끝장” 유배 길목이자 애끓는 이별 현장

좌승훈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05.25 01:54

수정 2018.05.25 02:03

제주 바람은 포구 사람들의 삶 좌우 
‘살통’ ‘목포 또슨굼이’…어부들의 안식처
소금 운반 관선 드나들던 ‘관선자리’
만남의 기쁨보다 헤어짐의 슬픔이 더 커 
제주다움이 한껏 묻어나는 한림읍 수원리 조물캐포구. '잠수포' 또는 '돈지개'라고도 부른다.
제주다움이 한껏 묻어나는 한림읍 수원리 조물캐포구. '잠수포' 또는 '돈지개'라고도 부른다.

[제주=좌승훈기자] 모든 만남은 포구에서 이뤄졌다. 이 땅의 끝 포구는 바다와 만났고, 바다는 또다시 포구와 만났다. 포구는 제주 선민들의 삶의 터전이자, 표류하던 외국 선박들이 기착지였다. 또한 포구는 고려와 조선조에 걸쳐 유형(流刑)인들이 오고가는 길목으로도 터 잡았다.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무근성창’ 인근에 자리 잡은 ‘연북정(戀北亭)’은 제주로 파견된 관리 또는 유형인이 고향과 임금이 있는 북녘 한양을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래던 정자다. 1590년 선조 23년 때 만들어졌다고 한다.

조천리는 예로부터 ‘조천진(朝天鎭)’ ‘조천관(朝天官)’이리고 했다. ‘관포(官浦)’라고 부르기도 했다.육지를 드나들던 관리들이 이곳에서 풍향을 측정했다고 해서 ‘조천(朝天)’이라고 불렀다는 말도 있다.

[fn+ 제주의 포구④] “여기 오면 끝장” 유배 길목이자 애끓는 이별 현장
조천포구와 연북정. 조천포구는 조선시대부터 제주에 유배당한 사람들이 들어오고 뭍을 왕래하는 사신과 조공선들이 활발하게 드나들었던 곳이다. /사진=제주관광공사
조천포구와 연북정. 조천포구는 조선시대부터 제주에 유배당한 사람들이 들어오고 뭍을 왕래하는 사신과 조공선들이 활발하게 드나들었던 곳이다. /사진=제주관광공사

또 제주시 화북포구의 옛 이름은 ‘별도(別刀)’다. 칼로 애를 끊는 듯한 사연이 깃든 이별의 현장이다. 아마 선정(善政)을 편 목사와의 이별은 애를 끓는 듯한 이별이었을 것이고, 폭정을 편 목사와의 이별은 생각하기조차 싫은 단호한 이별이었을 것이다.

화북포는 포구가 둘이다. ‘엉물머리’와 ‘금돈지’다. 이 두 포구는 산지항이 축조되기 이전까지 제주의 관문이자, 유배의 길목이었다. 제주목(濟州牧)과 가까워 유형인을 인계하기에 적당했다.

뱃길은 전남 해남・강진・영암으로 이어졌다. ‘아~, 여기까지 오면 끝장이다. 이 관복도 이제는 쓸 모가 없게 되었구나’. 화북포로 향하는 제주 뱃길 한 편에 자리 잡은 섬 이름조차 ‘관탈(冠脫)’이다. 귀양살이에 대한 유형인들의 애절한 심정이 녹아 있다.

[fn+ 제주의 포구④] “여기 오면 끝장” 유배 길목이자 애끓는 이별 현장

화북포구는 조천포구와 함께 제주의 관문으로 부임하는 목민관이나 김정희, 최익현 등 유배인들이 이곳을 통해 제주에 들어왔던 역사적인 포구다. 화북포구에는 해상을 왕래할 때 안전을 기원하던 사당인 해신사가 남아있으며, 현재도 매년 정월 보름과 선박이 출항하기 전에는 해신제를 지내어 안전을 기원한다. /사진=제주관광공사
화북포구는 조천포구와 함께 제주의 관문으로 부임하는 목민관이나 김정희, 최익현 등 유배인들이 이곳을 통해 제주에 들어왔던 역사적인 포구다. 화북포구에는 해상을 왕래할 때 안전을 기원하던 사당인 해신사가 남아있으며, 현재도 매년 정월 보름과 선박이 출항하기 전에는 해신제를 지내어 안전을 기원한다. /사진=제주관광공사

남원읍 태흥2리의 ‘관선자리’는 소금을 운반하던 관선이 드나들었다고 해서 ‘관선포(官船浦)’라고 한다. 한국수산지에 따르면, 1908년 이곳에서 생산된 소금이 무려 1439근이나 된다. 1근은 0.6kg이니, 당시로선 대단한 것이었다.

‘관선자리’ 또한 만남의 기쁨보다 이별이 아픔이 더 컸던 포구다. ‘관선자리’는 ‘대스렁코지’와 ‘애비리코지‘ 사이에 있다. 이 중 ’대스렁코지‘는 관선을 맞았던 곳이다. ’애비리코지‘는 이 보다 더 바다 쪽으로 나간 곳에 있다. 헤어짐의 장소다.

이곳 사람들은 “’대스렁‘과 ’애비리‘는 만남(待)과 이별(別)의 뜻을 담고 있다”면서 “’애비리‘가 ’대스렁‘보다 더 바깥에 있는 것은 만남의 기쁨보다 헤어짐의 아픔이 더 컸기 때문”이라고 했다.

성산읍 신양포구에서는 성산일출봉과 섭지코지가 한눈에 보인다. /사진=제주관광공사
성산읍 신양포구에서는 성산일출봉과 섭지코지가 한눈에 보인다. /사진=제주관광공사

바람은 포구사람들의 삶을 좌우한다. 어떤 바람은 불면 물살이 거칠어지고, 또 어떤 바람은 바닷길을 열어준다.

한림읍 귀덕2리 ‘진질개’는 바람에 매우 민감한 곳이다. ‘진질개’의 근간이 되고 있는 ‘진질코지’는 호랑이가 포효하듯 일 년 내내 크고 작은 바람에 시달린다. 봄 샛바람, 여름 마파람, 가을 갈바람, 겨울 하늬바람만 있는 게 아니다. 신샛바람, 갈마파람, 산북 쇠바람, 댓바람, 돗괭이, 소타니 등도 있다. 하늬바람도 서하니, 갈하늬, 높하늬로 나뉜다. 태풍은 ‘넘친 바람’으로 통한다. 한라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을지풍’이라고 했다.

일러주는 대로, 대충 감만 잡을 뿐이다. 이곳에 붙박고 살지 않는 한, 바람의 방향과 습성을 일일이 따지기 어렵다. 섬의 이쪽에서 불어서 한라산을 넘고 섬의 저쪽에 가 닿으면 어느새 바람 이름도 바뀌고 만다.

어느 하나 그냥 스쳐 지나칠 간들바람이 아니어서, 특히 포구에 붙박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누대로 바람에 맞서 생존을 위한 숙명적인 싸움을 벌여야 했다.

제주시 애월읍 금성리의 '모슬개' /사진=제주관광공사
제주시 애월읍 금성리의 '모슬개' /사진=제주관광공사

오죽하면, 한림읍 협재리 사람들은 포구를 ‘살통’이라고 불렀을까? 풍파가 아무리 거셀지라도 배가 일단 포구에 들어서면 마음이 놓인다는 것이다.

이곳 보재기(어부를 이르는 제주어)들에게 순풍은 ‘을지풍’이고, 악풍은 ‘마파람’과 ‘샛바람’이다. 돛 달고 어로작업을 하던 시설, 한라산 자락에서 흘러나온 을지풍은 어장으로 나가는데 더없이 좋은 바람이다. ‘순풍에 돛단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힘이 되는 바람이다.

그러나 ‘마파람’과 ‘샛바람‘은 귀향 뱃길을 막는 못된 바람이다. 지형적으로 포구 정면에서 삐딱하게 불어 닥친다. 돛이 두 개 달렸건, 세 개 달렸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수 없었던 까닭에 바람을 잘못 만나면 곧잘 애월(마파람) 쪽이나 판포·신창(샛바람) 쪽으로 밀려나게 된다.

애월읍 구엄포구와 돌 염전. /사진=제주관광공사
애월읍 구엄포구와 돌 염전. /사진=제주관광공사

지금은 매립이 되었지만, 구좌읍 평대리 ‘갯머리’ 포구에는 ‘목포 또슨굼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또슨굼이’는 ‘안전한 곳’ 혹은 ‘따뜻한 곳’을 말한다.

목포는 큰 항구다.
원양에서 돌아온 어선들의 편안한 안식처다. 항구가 워낙 커 웬만한 바람에도 끄덕없다.
‘갯머리’의 ‘목포 또슨굼이‘도 목포항 못지않게 어선들의 안전한 피항지였으리라.[4/5 끝]

[편집자 주 : 제주의 포구는 5회로 나눠 연재됩니다.]
jpen21@fnnews.com 좌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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