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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마스터 블렌더’ 이종기 명사

조용철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07.07 08:00

수정 2018.07.0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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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기 명사
이종기 명사

술과 관련된 업종에 종사자라면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종기 명사는 ‘한국 술의 아버지’라 불린다. 그는 국내 최초의 ‘마스터 블렌더’로 ‘패스포드’, ‘썸싱스페셜’, ‘윈저’,‘골든블루’ 등 국내 위스키 시장의 거의 모든 술이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대한민국 주류 역사에 산 증인이면서, 그는 자신을 ‘우리 술의 독립운동가’라고 선언하고 ‘술’에 인생의 모든 것을 바치고 있다.

서울대 농화학과 75학번인 이종기 명사는 첫 직장으로 오비맥주에 취업했다. 그 후 그는 27여 년간 다국적 주류회사 씨그램, 디아지오코리아 부사장을 거치며, 국내 양주 및 증류 시장에 일인자로 우뚝 서게 된다. 직장생활을 하며 승승장구하던 그가 술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게 되는 계기는 199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두산 재직 당시, 스코틀랜드로 ‘양조학’을 배우기 위해 유학을 가게 되는데, 담당 교수가 세계 각국에서 모인 학생들에게 자기 나라의 대표 술을 가져와 시음회를 열자고 했고, 그 자리에 이종기 명사는 인삼주를 가져갔다. 그런데 인삼주를 마신 교수는 ‘한국 사람들은 술과 약을 구분하지 못하냐?’는 혹평을 했다고 한다. 반면 일본 유학생이 가져온 청주와 위스키는 칭찬을 받는 것을 보고 그는 상당히 자존심이 상했다. 그는 그 일로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우리 술’을 만들겠다고 결심한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15년이 지난 2005년 5월, 그는 충주에 ‘세계술문화박물관(리쿼리움)’을 오픈한다. 30년간 술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세계 각 곳에서 수집한 수집품을 정리해, 사비로 박물관을 만들었다. 그가 ‘우리 술의 독립운동’을 위한 처음 일로 박물관을 연 이유는, ‘우리나라 술 문화’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꾸고 싶어서였다.

이 명사는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가양주’ 문화가 다양한 형태로 발달했고, 일제강점기 전까지만 해도 14만 개의 양조장이 있었다. 프랑스의 와이너리가 12만 개 정도라고 하니 우리나라의 술 문화가 얼마나 다양하고 발전했는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전쟁 군수용으로 보급한 ‘희석식 소주’가 오늘날 우리나라 대표 술이 되었고, 조세확보를 명분으로 가양주 문화를 모두 없애고, 공장에서 만든 값싼 막걸리가 우리의 전통주가 되어버렸다. 일제의 우리 문화 말살 정책이 우리의 술 문화를 저급화 시켰다. 술은 그냥 ‘마시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문화’라고 이 명사는 강하게 주장한다.

‘향음주례’라 해서 우리의 전통 술 문화는‘격식과 예절’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와 군사정권을 거치며 전통 술 문화는 사라지고, 폭탄주를 돌리고 폭음하며, 취하는 것을 목적으로 술을 먹는, 나쁜 술 문화가 한국의 술 문화인 것처럼 인식되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왜곡된 술의 인식과 술에 관한 역사와 문화를 바로잡는 것이 첫 번째 과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도 많은 적자를 감수하면서 ‘리쿼리움’을 통해 세계와 우리의 술 문화를 제대로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 박물관을 찾는 어린이와 학생들에게는 술에 관한 역사와 신화 등의 이야기를 통해 술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발효’와 ‘증류’등 술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담긴 과학을 가르쳐주고 있다.

이 명사는 2006년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본격적인 우리 술 개발을 시작했다. 사실 우리 술 개발을 위한 연구는 스코틀랜드 유학에서 돌아온 이후 계속해왔다. 그는 쌀, 보리, 수수, 감자, 각종 과일 등 양조에 쓸 수 있는 수십 가지 원료로 술을 만들어 봤다. 그러나 우리 농산물에는 양조용 원료라는 개념이 없어 적당한 재료를 찾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의 농산물은 대부분 식용을 위한 것이고, 술을 만들기 위한 전용 농작물이 없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경우 술을 위한 별도의 쌀 품종이 80여 개, 유럽의 경우도 와인 원료인 포도는 샤르도네, 리슬링 등과 같이 식용이 아닌 양조용 품종으로 만든다. 그래서 결국 그가 명주(名酒)를 만들기 위해 선택한 한국산 농산물의 원료는 ‘오미자’였다.

이 명사는 “술은 취하기 위해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수백 가지 요소로 인해 결정되는 색과 맛과 향 등 매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술에는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도 담겨 있어야 한다. 오미자가 그걸 충족한다”고 소개했다.

2006년, 우연히 방문한 문경의 농장에서 단맛, 신맛, 쓴맛, 짠맛, 매운맛의 복합적인 맛을 내는 오미자를 보고 명주(名酒)의 재료로서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런데 오미자는 색과 향이 뛰어나지만 쓴맛과 매운맛이 강해 천연방부제 역할을 하면서 발효를 억제해 술을 만드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그는 샴페인의 본고장 프랑스 샹파뉴 지방을 오가며 연구를 거듭했고, 3년에 연구를 거쳐 드디어 오미자로 만든 스파클링 와인 ‘오미로제’를 개발했다. 포도 와인에 비해 오랜 발효와 숙성의 과정이 필요했지만 그 향과 풍미가 고급 와인에 비해 뒤지지 않았다. 이후 ‘오미로제’는 ‘세계핵안보정상회의’와 ‘평창 패럴림픽’ 건배주로 선정되는 명예를 갖게 된다. ‘오미로제’ 개발 이후에 오미자와인을 증류한 ‘고운달’과 사과주 ‘문경바람’ 등 우리 농산물을 재료로 술 개발을 지속해 왔다.

그가 술에 관한 일을 시작한 지 어느덧 40여 년 가까이 되어간다. 탄탄한 직장에서 잘 나가던 그였지만 세계에 내놓을 우리 명주(名酒)를 만들겠다고 나선 이후, 여러 가지 어려움도 겪었다. 하지만 그는 술을 통해 우리의 농촌이 발전할 수 있다고 강하게 믿는다.

서민들을 위한 값싼 ‘희석식 소주’도 좋지만, 우리의 문화, 우리의 스토리가가 담긴, 우리의 농산물로 만든 ‘괜찮은 술’이 늘어난다면, 술이 지역의 경제와 관광을 발전시키고, 술에 관한 인식도 변화가 일어난다고 그는 말한다. 우리의 농업을 살리는 ‘6차 산업’에서 가장 부가가치 높은 제품이 술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좋은 술이 좋은 술 문화를 만든다고 그는 말한다. 좋은 술은 좋은 음식을 먹게 되고, 좋은 사람과 교감하며 좋은 스토리를 만든다. 이것이 그의 술에 대한 철학이다.

그는 지금도 한국의 술을 세계의 명주로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외국에 유명 수입 양주와 값싼 소주 시장과 경쟁하면서 시장을 개척하기에는 그는 아직도 넘어야 할 길이 많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여전히 대한민국 술의 독립운동을 진행 중이다.

이 명사는 “정성과 품이 들어간 술은 함부로 마실 수 없다.
또 좋은 술은 좋은 스토리를 담고 있다”고 강조했다.

yccho@fnnews.com 조용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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