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갤러리, 신작 20여 점 선봬
교통안전 표지판이 전시장 중앙에 도열돼 있다. ‘SLOW’ ‘TURN’…. 흰 벽에 걸린 캔버스에는 고속도로 아스팔트에서나 볼법한 방향 표시선이 그려져 있다. 소격동 국제갤러리 3관의 전경이다.
2관 입구에는 하얀 꼬리뼈가 관객을 맞이한다. 꼬리뼈 맞은편에는 발코니에 카파 추리닝을 입은 남자 조각상이 관람객을 바라본다.
두 개의 남성 토르소 조각이 각각의 좌대 위에 올려져있는 전시물도 있다. 둘 다 허리에 손자국이 찍혀있다. 덩그러니 놓인 원형 모양의 바도 있다. 맥주 탑이 2개 설치돼 있을 뿐 맥주를 따를 잔도, 바텐더도, 바로 드나들 수 있는 입출구도 없다.
독일 베를린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작가 듀오, 엘름그린 & 드라그셋의 개인전 ‘Adaptations’이 국제갤러리에서 3월 21일부터~4월 28일까지 열린다.
지난 2015년 '천개의 플라토 공항' 개인전에 이어 국내에서 개최되는 두 번째 개인전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건축, 설치, 조각, 퍼포먼스 등 다양한 장르를 관통하며 현대사회에 화두를 제기하는 신작 20여 점을 K3 및 K2 1층 전시장에서 선보인다.
엘름그린 & 드라그셋 전시는 이들의 화법이 생소한 이들에게는 마치 수수께끼를 푸는 것과 같다.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도 떠오른다. 하지만 그들의 언어를 조금만 이해하면, 작품을 보면서 우리의 일상과 삶을 곱씹는 재미가 있다.
두 사람이 도로표지판을 화이트큐브에 들인 이유는,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기호인 교통 규정과 표지판이 얼마나 사람들의 행동을 통제해오고 있는지를 돌아보자는 취지다. 현대인들이 너무나 당연시여기고 있는 사회 규범들에 대한 문제제기인 것이다.
발코니 남자 조각상은 전시 관람의 보편적 행태에 대한 반기이자 '사색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보통 관람객은 작품을 보러 전시장에 오지만, 남자 조각상이 관람객을 응시함으로써 잠시 역전된 생황에 처한다. 발코니라는 공간적 속성도 따져보면 흥미롭다.
과거에는 없던 현대적 건축물로, 내부와 외부의 경계에 있다. 남자 조각상은 사적인 공간에 있기에 추리닝을 입고 담배를 피우며 밖을 내다보지만, 역으로 외부 사람들이 남자를 볼 수 있기에 행동의 제약이 따른다.
꼬리뼈는 인종이나 성별에 상관없이 그 형태가 바뀌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즉, 꼬리뼈는 우리 모두가 동물계로부터 유래한 종족임을 상기시킨다. 흥미로운 것은 이 꼬리뼈가 근 미래에 해당되는 2075년 인간의 꼬리뼈라는 것이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인간의 꼬리뼈 모양이 달라질 것을 감안해 제작했다.
두 개의 토르소에 대한 작가의 의도도 흥미롭다. 이들은 부동의 조각이 실제는 사람의 동적인 행동의 결과물이라는 점, 허리에 찍힌 다섯 손가락은 사랑과 폭력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고 설명한다. 텅빈 바는 오프라인보다 SNS 등으로 소통하는 현 세대에 대한 풍자다.
국제갤러리 측은 "K3에서 선보이는 작품들이 공공 장소에서 사람들의 행동을 통제, 지시, 또는 안내하는 구조물을 다룬다면, K2를 구성하는 작품들은 신체와 이에 맞닿은 사적 영역을 추상과 구상을 넘나들며 재현한다"고 설명한다.
시인 출신인 덴마크 작가 마이클 엘름그린(첫번째 사진 왼쪽)과 연극배우 출신의 노르웨이 작가 잉가 드라그셋은 1995년부터 함께 작업하며, 세계 속 고착화된 관념들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하고 고발하는 등 현대사회에 대한 다채로운 담론을 던져왔다.
엘름그린은 자신의 예술 활동에 대해 “새로운 형태의 언어를 만드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처음부터 어젠다를 설정하고 작품을 만든다기보다는, 창작 과정에서 새로운 시각을 열어간다”고 했다.
드라그셋도 "예술을 통해 메시지를 주는데 주안점을 두는 편”이라면서도 "예술이 무엇인지 아직도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시험 보는 학생처럼 전시를 볼 필요는 없단다. 엘름그린은 “정답은 없다. 우리는 예술에 대한 흥미를 갖도록 담론을 제시하는 것이지 정답을 주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관객이 관람을 통해 더 나은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예술은 호불호가 있기에 우리 작품을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있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엘름그린 & 드라그셋은 2000년 미국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이 주최하는 휴고 보스상 최종 후보에 이름을 올렸으며, 2002년 독일 내 가장 권위 있는 미술상인 함부르크 반 호프상을 수상하며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영국 런던 트라팔가 광장의 공공미술 프로젝트인 네 번째 좌대 프로젝트의 여덟 번째 커미션 작가로 선정돼 ‘Powerless Structures, Fig. 101’(2012)을 선보였고, 2016년 여름에는 미국 뉴욕의 비영리 미술기구 퍼블릭 아트펀드가 주관하는 뉴욕 록펠러 센터 공공미술 프로젝트에 ‘Van Gogh’s Ear‘(2016)를 설치해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2009년 개최된 53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는 북유럽과 덴마크를 대표해 국가관전 ‘The Collectors’를 선보여 주목을 받은 바 있다. 2017년 제15회 이스탄불 비엔날레에서는 총감독을 맡아 기획자로서의 면모 또한 발휘했다.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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