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사설

[구본영 칼럼] 北 자력갱생은 답이 아니다

구본영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4.24 17:12

수정 2019.04.24 17:12

핵 움켜쥔 채 경제 못살려
김정은 '리틀 스탈린' 아닌 고르바초프식 개방 택해야
[구본영 칼럼] 北 자력갱생은 답이 아니다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 결렬 이후 북한 측의 험구가 점입가경이다. 며칠 전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은 "멍청하다"고 존 볼턴 백악관 안보보좌관을 인신공격했다. 앞서 권정근 미국담당국장도 "저질적 인간됨을 드러냈다"고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을 비난했었다. 하긴 이는 약과다. 지난 12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하지 말라"고 사실상 문재인 대통령을 직격했다.

하지만 북·미 대화의 판은 깨지 않으려는 기미다.
15일 김일성 주석의 생일행사를 열병식도 없이 치렀다. 김정은은 신형전술무기 사격실험을 참관했다. 그러나 저강도 시위였다. 일련의 거친 언사는 국제제재가 풀리지 않은 데 따른 좌절감일 법하다. 경제를 살리려면 비핵화를 결단해 외부의 도움을 얻어야겠지만, 그러다 체제가 무너질까 두려운 세습정권의 딜레마를 반영한다는 얘기다.

북한 정권이 이런 진퇴양난에서 헤어날 묘책은 없어 보인다. 지난 11~12일 최고인민회의에서는 매해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던 국가경제발전 5개년 계획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김정은도 시정연설에서 '자력갱생'만 강조했다. 군수공업 지역인 자강도의 책임자였던 김재룡이 새 총리로 기용된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김일성종합대에서 수학한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는 그를 "시장화보다 국가통제와 사상동원을 바탕으로 하는 구식 경제모델을 선호하는 사람"으로 봤다. 그의 해석이 맞다면 북측이 당분간 '농성 체제'로 버티겠다는 신호로 읽힌다. 최소한 미국에 대화재개 시한으로 통첩한 연말까지는 말이다.

이는 김정은 집권 직후에 비해 확연히 역주행이다. 북한은 2012~2016년 시장화를 촉진하는 개혁조치를 꾸준히 취했다. 체제 동요를 염려해 본격적 개방은 자제했지만…. 그래서 그 기간 북한 경제는 느리지만 성장했다. 그러나 핵 문제로 이중삼중의 제재를 받으면서 2017년(-3.5%)부터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섰다.

남북한 간 1인당 소득격차는 현재 25 대 1 수준이다. 제재가 풀리지 않으면 격차는 더욱 벌어질 수밖에 없다. 더욱이 15일 유엔인구기금(UNFPA)의 '세계 인구 현황 보고서'를 보자. 2019년 기준 기대수명은 남한 83세, 북한 72세였다. 북한의 열악한 의료상황과 식량부족으로 말미암은 현격한 격차다. 북한 당국이 핵을 움켜쥔 채 문을 닫아건 게 근본원인일 것이다.

1990년대 후반 1차 북핵 위기 때 적어도 북한 주민 수십만명이 굶어죽었다고 한다. 만일 북한 당국이 다시 제2의 '고난의 행군'을 선택한다면? 북한 주민들의 감당해야 할 고통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그래서 이제 김정은 위원장에게 '오지랖 넓은' 고언을 해야겠다. 어차피 자력갱생은 미망이니, 이참에 생존법을 바꾸라는 것이다.

김정은이 24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찾았다. 위기 때마다 뒷문을 열어주던 중국이 미국과의 통상대전으로 발이 묶이자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임시변통일 뿐이다. 북한 주민뿐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도 단계적 개혁·개방이 최상의 시나리오다.
독재 권력은 총구에서 나올지 모르지만, 말 위에서 영원히 권좌를 지킬 순 없다. 북한이 속히 비핵화를 결단해 국제사회의 정상적 일원이 돼야 할 이유다.
그가 '리틀 스탈린'의 행보가 아니라 '고르바초프의 길'을 걸어야 하다는 뜻이다.

kby777@fnnews.com 논설위원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