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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 톡] 강대국 힘에 흔들리는 다자협의체

조창원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5.03 17:05

수정 2019.05.03 17:05

[차이나 톡] 강대국 힘에 흔들리는 다자협의체

세계질서를 유지·관리하는 다자협의체의 공신력이 땅에 떨어지는 일들이 잇따라 벌어지고 있다.

세계 패권을 둘러싼 강대국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각종 협의체들의 판정이 무용지물로 전락한 것. 애초 다자협의체를 구성할 때부터 강대국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그들의 입김이 거세게 작용하니 원만한 동의를 끌어내기 쉽지 않다. 더구나 새로운 강대국 출현과 패권구도의 판이 강하게 흔들릴 때 다자협의체의 힘도 떨어지는 게 역사적 현실이다.

'후쿠시마 수산물 분쟁'에서 패소한 일본이 아베 신조 총리부터 장관들까지 일제히 나서 세계무역기구(WTO)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게 대표적이다.

WTO 상소기구는 일본이 제기한 한국 정부의 후쿠시마 주변산 수산물 수입금지 관련 제소 사건에서 1심 격인 분쟁해결기구 패널의 판정을 뒤집고 한국의 처분이 타당하다고 판정했다. 이번 패소로 수세에 몰린 아베 정권이 몽니를 부리다가 이내 WTO 체제 개혁이라는 프레임을 내놨다.
일본 외교의 치욕스러운 참패라는 여론의 역풍을 피하기 위해 교묘하게 WTO 문제로 비난의 화살을 돌린 셈이다. 급기야 아베 총리는 최근 캐나다 방문 후 기자회견에서 한국의 후쿠시마 주변산 수산물 수입규제에 대한 WTO의 판정을 문제시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오는 6월 오사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WTO 개혁을 논의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일본의 억지 논리는 마침 자국 내에서 G20 정상회의가 예정돼 있는 데다 어차피 주요 선진국들이 WTO 개혁을 언급하고 있다는 기류에 편승하는 모습이다. 이번 패소만 놓고 보면 몽니에 불과하지만 WTO 체제 논의에 물타기를 하면 최소한 국내의 비난 여론은 잠재울 수 있어서다.

그럼에도 일본의 이 같은 몽니가 지지부진하던 WTO 개혁에 불씨를 살리는 전환점이 되는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지게 됐다. 세계 패권국을 노리는 중국을 겨냥해 미국과 유럽에서 WTO 개혁을 강조해왔기 때문이다. 패권을 거머쥐기 위해 자기 편에 유리한 판을 만들려는 강대국 간의 샅바싸움이 본격화될 수 있다. 이는 WTO 탄생 비화와 맥락을 같이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무역질서를 규율했던 관세무역일반협정(GATT) 체제를 흔든 게 미국이다. 1990년대 초 일본 제조업에 타격을 받아 경제위기에 몰린 미국이 상품에 국한됐던 기존의 무역규범을 서비스와 지식재산권으로 확정하고, 상소기구 및 분쟁해결제도까지 개선한 현재의 WTO 체제를 출범하는 걸 주도했다. 그런데 현재 이 체제의 조약을 가장 많이 어기는 국가가 세계 2강으로 불리는 미국과 중국이다.

세계패권에 도전하며 인류공영과 발전을 자처하는 중국도 앞뒤가 맞지 않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WTO체제 조약과 배치되는 국가 주도의 경제지원뿐만 아니라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 판결에 대한 태도에도 강대국의 이율배반적 모습이 드러난다.

필리핀은 중국이 지난 2012년 필리핀의 배타적경제수역(EEZ) 안에 있는 남중국해 리드뱅크(필리핀명 렉토뱅크)의 스카버러 암초(중국명 황옌다오, 필리핀명 파나타그 암초)를 강제로 점거하고 남중국해 대부분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자 PCA에 제소한 바 있다. 이어 2016년 7월 남중국해 대부분에 대한 중국의 영유권 주장에 법적 근거가 없다는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중국은 이 판결을 인정하지 않고 여전히 남중국해에서 필리핀과 긴장구도를 펼치고 있다.

강대국 간 충돌로 여러 다자 틀이 새롭게 재편될 조짐이다.
외교적 파워를 가진 강대국의 몽니가 현실이 되는 냉엄한 현실에서 틈바구니에 낀 국가들이 바짝 정신을 차려야 할 시점이다.

jjack3@fnnews.com 조창원 베이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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