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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절반을 수영선수로... 태극마크 꿈꾸는 열다섯 [김성호의 플레이어]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5.18 13:02

수정 2019.05.20 11:03

[김성호의 플레이어 7] 수영선수 조민혁
‘삐이익’ 신호음과 함께 여덟 명의 선수가 물속에 몸을 던졌다. 물밑에서 몇 번의 발차기를 한 뒤에야 모습을 드러낸 이들은 세찬 물보라를 일으키며 앞으로 나아간다. 터치패드를 찍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25초 남짓, 전광판에 찍힌 1위 기록은 24초99였다. 주인공은 창천중학교 3학년 조민혁 선수, 2위와의 차이는 0.02초에 불과했다.

수영은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대표적인 기록경기다.

이번 대회에서와 같이 0.02초 차이로 희비가 갈리는 건 일상이다. 자유영 50m 세계신기록은 브라질의 세자르 시엘루(César Augusto Cielo Filho)가 2009년 세운 20초91, 한국신기록은 양정두가 2015년 기록한 22초32다. 한국 남자 중학부 자유영 50m 경기가 보통 25초 내외에서 승부가 갈린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4초 남짓한 시간 안에 전 세계 모든 수영선수가 모여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수들은 찰나의 시간을 극복하기 위해 매일 자기와의 싸움을 벌인다. 전설적인 수영선수 마이클 펠프스와 박태환도 깨어 있는 시간의 절반가량을 수영장에서 보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들이 선 곳에 도달하길 꿈꾸는 많은 이들이 같은 길을 걷는다. 열다섯 중학생 조민혁군도 다르지 않다.

열다섯 소년이 새벽5시에 일어나는 이유

전국소년체육대회 서울시 대표단복을 입은 조민혁 선수 / 제공=조현석
전국소년체육대회 서울시 대표단복을 입은 조민혁 선수 / 제공=조현석


지난 9일 경북 김천시 김천실내수영장에서 열린 ‘제68회 대한수영연맹 회장배 전국수영대회’ 남자중학부 자유영 50m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조민혁 선수(창천중학교 3학년)의 삶은 학교와 수영장이 전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학교에서 공부한 뒤, 저녁 7시까지 잠실 수영장으로 이동해 2시간 정도 수영훈련을 한다. 집에 오면 10시가 넘은 시각, 밀린 공부를 하고 체력훈련까지 마친 뒤 잠자리에 든다.

대회가 없는 동계시즌은 훨씬 고된 시기다. 오전 6시부터 시작하는 아침훈련을 위해 5시면 기상해야 한다. 8시까지 훈련을 한 뒤 학교에 가면 녹초가 돼 절로 눈이 감긴다. 저녁 훈련도 소화해야 하니 잠들 때까지 남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을 제외하면 태릉선수촌 국가대표 선수들과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다. 앳된 모습이 역력한 열다섯 소년에겐 벅찬 일정 같지만, 민혁군의 눈빛엔 흔들림이 없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수영을) 본격적으로 시작해서 쭉 이 스케쥴로 살았어요. 동계훈련이 있는 4개월 정도는 아침훈련을 하고, 아침훈련이 없을 땐 (비는 시간에) 체력훈련을 해요.”

10살이던 초등학교 3학년 수영을 시작해 6년을 같은 일정으로 살았다니 감탄이 절로 나온다.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학교생활을 하고, 여기에 더해 하루 최소 두 시간을 수영훈련으로 보내는 게 일상이 됐다. 또래 선수 대부분이 그렇듯 국가대표를 꿈꾸고 있기에 앞으로 10년은 같은 일정으로 보낼 각오다.

“국가대표가 되는 게 꿈이에요. 부모님이 말씀하시는데 지금 고생해야 어른이 돼서 편해진다고 하시더라고요. 나이 먹고 편하게 살면 되니까 지금은 열심히 할 거에요.”

왜 수영을 하느냐는 질문에 민혁군은 별 고민 없이 이렇게 답했다. 남중생다운 단순하고 명쾌한 답이다. 편한 것보단 이룰 것에 끌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긴, 열다섯 먹은 수영선수가 철학자일 수는 없는 노릇. 초를 다투는 스포츠에 전념하는 선수답게 단순함과 꾸준함, 우직함이 엿보인다.

지금부터가 전성기, "기록 줄이는 희열 커"

훈련에 열중 하는 조민혁 선수 / 사진=조현석
훈련에 열중 하는 조민혁 선수 / 사진=조현석

하지만 한 인간을 지탱하는 게 그저 목표의 존재만일 수는 없다. 즐거움을 주는 순간에 대해 묻자, ‘기록을 줄이는 희열’이란 답이 돌아온다. “기록을 줄였을 때 느끼는 희열이 있어요. 이것 때문에 계속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작년엔 자유영 50m가 25초 후반, 100m는 56초였는데 1년 사이에 많이 줄였어요.”

자유영 단거리가 주종목인 조민혁 선수는 이번 회장배에서 50m와 100m 결승에 올라, 각 24초99, 54초63으로 레이스를 마쳤다. 지난해 기록을 1초 이상 줄인 것으로, 한창 성장기를 보내고 있음을 감안해도 상당한 발전이다.

민혁군은 회장배에 한 달 앞서 열린 제9회 김천전국수영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뒀다. 24초84와 55초04로, 메달권엔 진입하진 못했지만 기존 기록을 크게 앞당겼다. 더욱 고무적인 건 주종목을 자유영 단거리로 전환한 게 얼마 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초까지만 해도 배영선수였기 때문이다.

아버지 현석씨는 민혁군이 겪었던 부상에 대해 이야기를 전했다. “민혁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소년체전에 나가게 됐어요. 그때 (훈련을) 너무 심하게 해서인지 어깨가 나갔고, 후유증이 있었죠. 그때만 해도 접영이 주종목이었는데 (부상을 겪고는) 밸런스가 깨져서 똑바로 나가질 못하고 자꾸 레인에 걸리는 거에요. 그래서 코치가 배영을 해보자고 제안했고 중학교 2학년 때까지 배영만 했어요. 그러다 중3에 올라와 앞으로 진로를 생각하게 되면서, 잘 하는 자유영 단거리로 종목을 바꾸게 됐죠.”

인생의 절반을 수영선수로 보낸 민혁군은 이제 막 전성기에 돌입했다. 기록이 크게 단축되고 전국대회에서 메달을 수확하는 등 실제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다. 기록단축과 수상은 본인에게도 커다란 자극과 동기부여가 된다.

“김천대회 때 딱 터치를 하고 기록을 보고 다시 옷을 가지러 갈 때 정말 제일 좋았어요. 메달은 못 땄지만 슬럼프를 깼으니까요. (경기 전 좋은 기록을 낼 거라는) 기대가 조금은 있었는데 크지는 않았죠. 지금 당장이라도 서울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었어요. 다음시합 안 뛰어도 될 것 같다고 느낄 만큼, 그 정도로 좋았죠.”

시즌은 아직 한창이다. 전국 모든 학생스포츠선수에게 최고의 대회로 꼽히는 전국소년체육대회가 한 주 앞으로 다가왔고, 다시 2주 후 제91회 동아수영대회가 열린다. 내로라하는 전국각지의 선수들이 모두 참가하는 큰 대회다. 민혁군 역시 우승후보다.

올해 소년체전은 특히나 의미가 깊다. 이번 48회를 마지막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예정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불거진 체육계 성폭력 문제 이후 나온 특단의 조치다. 주무부처인 교육부와 문화체육관광부, 대한체육회는 엘리트 중심의 성과지상주의와 여기에 터 잡은 체육계 비리를 바로잡는다는 걸 소년체전 폐지사유로 제시했다. 미투 사건이 체육계를 넘어 온 사회를 뒤흔든 가운데 반대주장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마지막 소년체전... "아쉬움 크다"

조민혁군과 아버지 조현석씨 / 제공=조현석
조민혁군과 아버지 조현석씨 / 제공=조현석

민혁군은 소년체전 폐지결정에 커다란 아쉬움을 드러냈다. “소년체전이 없어진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저는 정말 안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저희 나이대나 더 어린 동생들에게 소년체전이 엘리트로 넘어가는 첫 관문이 되어준다고 생각해서요. 어쩌면 앞으로 한국에서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에 나갈 선수가 나올 수 있을까 하는 걱정까지 들어요.”

현석씨가 말을 보탠다. “다른 전국대회라고 해봐야 하루를 잡고 오전에 예선 오후에 결승을 치러 1등부터 8등까지 가리는 거라면, 소년체전은 각 구별로 수영을 잘 한다 하는 선수들이 나와서 지역별로 1·2등을 뽑고 이 선수들이 다시 겨뤄서 서울시 대표를 뽑고 그 선수들로 소년체전까지 나오는 과정을 거쳐요. 그 과정에서 각 지역, 그리고 서울시에서 제일 잘 하는 선수라는 자부심이 생기죠.”

실제로 체육계 많은 인사, 특히 유소년 선수 및 가족들은 소년체전 폐지 결정에 큰 아쉬움을 드러낸다. 일각에선 세월호 참사 이후 해경을 폐지했던 결정과 무엇이 다르냐는 성토까지 나온다.

다른 학생선수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수년 째 아들을 가까이서 지원해온 현석씨는 엘리트체육과 생활체육을 구분해 육성할 필요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폐지하는 취지를 모르지 않지만, 즐기는 운동과 꿈을 갖고 치열하게 하는 운동엔 분명한 차이가 있어요. 이걸 통합한다는 건... 엘리트 체육은 엘리트 체육대로 국가에서 관심을 갖고 진행해야 성과가 날 거라고 봐요.”

한국 수영이 처한 열악한 현실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현석씨는 “사람들의 관심이 인기종목에만 쏠려 있으니 잘 모르지만, 전국에 50m 수영장이 많지가 않아요. 대회를 자꾸 김천에서 하는 것도 시설이 되는 곳이 거기 뿐이라서죠. 엘리트 선수들은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처럼 50m레인에서 운동을 해야 하는데, 이런 환경이 한국엔 많지 않아요. 실제 세계적인 대회가 열리는 환경과 같은 조건에서 운동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아쉬움이 있죠.”

성인이 되기 전까지 세계대회에 출전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인 한국에서 국제기준에 어울리는 시설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건 치명적인 문제다. 유소년 선수 대부분이 실전과 같은 환경을 경험하지 못한 채로 성장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수년 전엔 박태환 선수조차 훈련할 수영장을 구하지 못해 애를 먹기도 했다.

가까이 있는 수영강국 일본과 비교하면 차이는 더 두드러진다. 박태환 외에는 내세울 선수가 보이지 않는 한국과 달리 일본은 세계적인 선수를 꾸준히 배출하고 있는 수영강국으로 분류된다. 훌륭한 시설을 포함한 엘리트 체육 인프라가 그 바탕에 있다.

이와 관련, 현석씨는 격차를 실감한다고 털어놨다. “저는 전문가는 아니지만 듣기만 해도 일본이 환경이 좋다는 게 느껴지죠. 우리 애는 한 레인에 9명씩 들어가서 연습하는데 거긴 선수마다 자기 레인이 있고 바닥에 거울도 깔려 있다고 하니까요.”

인프라도 열악하고 엘리트 체육인을 육성하는 길마저 막혀버린 한국수영이지만 현석씨와 민혁군의 꿈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지금보다 더한 환경 속에서 조오련·최윤희가 나왔고, 박태환이 누구도 간 적 없는 곳까지 나아갔다. 이제 ‘플레이어’가 민혁군의 꿈을 지켜보기로 한다. 어쩌면 멋진 역사의 첫 인터뷰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가끔 상상합니다. 비디오가게 점원 타란티노를, 차고 안의 잡스를, 아를의 반 고흐를 만나는 순간을요. 연습구장에서 땀 흘리는 메시를, 취재에 치이던 트웨인과 헤밍웨이를 만나는 건 또 어떨까요. 상상만으로도 짜릿합니다. 저도 한 때는 예술에 삶을 걸겠다고 맹세했었지요. 어찌나 즐겁고 괴로웠는지, 얼마나 뜨겁고 슬펐던지를 기억합니다. 꼭 한 번이라도 그 시절 나를 만날 수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래서 기획했습니다. 만날 가치가 있는 사람을 만나 들을 가치가 있는 얘기를 듣는 인터뷰 프로젝트를요. '플레이어'라 이름붙인 이 길 위에서 애저녁에 떠나가버린 나와 만나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를 일입니다. 조건은 오로지 셋입니다. 꿈이 있을 것, 꿈을 향해 달리고 있을 것, 매력적일 것. 플레이어가 이름을 얻지 못한다 해도, 필요한 곳에 조그마한 힘이라도 건넬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럼 제 인생의 플레이어일, 제 삶 가운데 투쟁하고 있을 멋쟁이 꿈돌이들에게 이 인터뷰를 바칩니다. 지긋지긋한 이 生을, 어디 한 번 살아내 봅시다.
]

팟캐스트 <김성호의 블랙리스트> <김성호의 플레이어>에서 더 깊은 인터뷰를 만날 수 있습니다.

pen@fnnews.com 김성호 안태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