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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논단] 구보 PD, 재벌 등극하다

안삼수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6.05 17:16

수정 2019.06.05 18:24

[fn논단] 구보 PD, 재벌 등극하다

모처럼 구보PD는 낮잠을 즐겼다. 그 바람에 저녁잠이 안 와 늦은 밤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인터넷에서는 10년 전 여자 탤런트의 자살사건이 다시 불붙고 있었다. 옛 동료가 증언을 하러 외국에서 귀국했고,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이 유튜브를 달구고 있었다. 성접대 리스트를 봤느니, 신변위협을 느껴 경찰이 호텔비를 댔느니, 온갖 기사와 가십들이 난무했다.

구보씨는 10년 전을 돌이켜봤다.
여배우의 슬픈 죽음을 둘러싸고 세상이 시끄러울 때 친한 방송기자가 일파만파 번지는 의혹에 대해서 캐물었다. "작은 사건 크게 보고, 큰 사건 작게 보시우." 그리고 덧붙였다. "이 시대 연예인은 대중에게 즐거움을 주는 산타클로스 같은 존재요. 하지만 세상 곳곳 산타클로스의 선물보따리를 훔치려는 메피스토펠레스들이 숨어있소. 모든 연예인이 늘 조심해야 합니다."

구보씨가 옛 생각에 빠져 있을 때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 얼른 나가서 현관문을 열었다. 술에 취한 웬 사내가 딸꾹질을 하며 구보씨 얼굴을 보더니 "죄송함다!" 하고는 비틀대며 계단을 내려갔다. 종종 본 얼굴이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참 팔자 좋은 사내라고 생각하며 구보씨는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인터넷에서는 그사이에 또 난리가 나 있었다. 외국에서 온 증인이 도망갔다며 악성댓글이 쏟아졌다. 구보씨는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때 현관 벨이 또 요란하게 울렸다. 아내가 깰까봐 얼른 뛰어나가 문을 여니 조금 전 그 사내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아이- 씨, 왜 가는 집마다 당신 집이야!" 그는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며칠 후, 동료들 모임에 나갔더니 누군가가 구보씨에게 아파트가 2채니 보유세 고민이 많겠다고 했다. 월급쟁이가 무슨 재주로 아파트 2채를 샀을까 의아한 눈빛으로 모두들 쳐다봤다. 그날부로 구보씨는 아파트 2채 가진 자가 되었다. 거짓은 진실보다 빠르다. 또 다른 모임에 갔더니, "오! 재벌 오셨네!"라고 인사들을 했다. 그 좋은 동네 아파트 2채를 가졌으니 재벌이 따로 있느냐며, 언제부터 부동산 투기꾼이었냐고 농담까지 했다. 일일이 해명할 수도 없는 일, 그날 밤 구보씨는 친구들에게 재벌 턱까지 쏘고 만취해 집으로 돌아왔다.

아파트 단지를 들어서며 한 달 전 그 사내를 떠올렸다. 구보씨도 실수할까봐 정신을 바짝 챙기고 아파트 동과 호수를 확인한 후 집 초인종을 눌렀다. 반응이 없어 다시 벨을 딩동, 딩동 눌렀지만 무반응. 구보씨는 딩동, 딩동, 딩동 세 번을 연거푸 눌렀다. 마침내 문이 삐죽 열리는가 싶더니 날카로운 음성이 새어나왔다. "앞으로 이 집에 들어올 생각 말고 다른 집에 가슈." 꽝!! 무슨 날벼락인가? 구보씨는 비틀비틀 계단을 내려와 아파트 공중전화 박스에서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끈질긴 전화질에 아내가 받았다. 구보씨는 고함을 질렀다.
도대체 왜? 그 순간 저쪽에서 맞고함이 터져 나왔다. "이 아파트 단지에 당신 집 또 있다며. 지금부턴 그 집에 가서 그 여자랑 잘 사시우." 그날 구보씨는 한 아파트 단지에 두 채의 집과 두 여자를 둔, 속칭 첩을 둔 사내가 되었다.
삼인성호(三人成虎)라더니! 젠장. 구보씨는 죄 없는 공중전화 박스를 힘껏 발로 찼다.

이응진 한국드라마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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