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양소리 기자 = 유럽 각국에서 극우정당이 약진하고 있다. 의회에 극우 정당이 없는 유럽 국가를 찾는 것이 더 힘들어졌을 정도다.
2015년 유럽 난민사태에서 시발된 유럽의 극우열풍은 극단 민족주의, 권위주의, 전체주의를 강화하고 있다. 이들의 인기비결은 비교적 단순하다. 바로 공격과 분노다.
극우 정치인들이 가장 쉽고 효과적으로 공격하는 대상이 있다. 지금까지 각국을 이끌어온 전문가와 지식인, 즉 엘리트들이다. 엘리트들은 나라를 이 꼴로 만든 장본인인 동시에 그동안 평범한 ‘우리’를 괄시해 온 집단이다. 엘리트에 대한 공격은 사회 질서에 대한 전복이다. 이를 통해 느끼는 쾌감은 극우에 대한 표심으로 돌아온다.
엘리트와 함께 이들이 배우고 구축해 온 각종 학문도 조롱과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자유로운 성적 지향성을 인정하고 평등을 요구하는 '젠더' 혹은 '페미니즘'은 극우의 가장 좋은 먹잇감이다.
◇극우 "젠더를 공부하지 말라"
지난해 12월 이탈리아에서는 중고교생을 상대로 한 설문지 하나가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성적 유동성(sexual fluidity), 즉 성적 취향의 변화를 자극한다는 이유에서다.
대체 어떤 질문이 이들을 이토록 흥분시켰을까. 설문지를 만든 것은 페루자 대학의 페데리코 바티니 교수였다. 조사의 목표는 이탈리아의 10대들이 이민자 혹은 동성애 혐오, 성차별 등에 얼마나 노출돼 있고 이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바티니 교수는 각 지역의 교육 당국의 협력을 받아 이탈리아 중부 54개 학교에 설문지를 돌렸다.
익명으로 시행된 조사는 학생의 국적, 부모의 국적, 종교적 신념, 정치적 성향과 성적 지향점 등을 체크하는 방식으로 구성됐다. 학생들은 '완전한 이성애자' '이성애의 성향이 있음' '양성애자' '동성애자' '동성애의 성향이 있음' '무성애자'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
일부 지역을 상대로 했던 설문조사는 지역의원이 방송 인터뷰에 나와 "성적 지향은 매우 민감한 문제이며 (이 설문은) 가정에서 이뤄지는 교육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비판할 정도로 유명해졌다. 이탈리아 연정을 구성하는 극우정당 '동맹'에 소속된 한 의원은 "설문조사가 학생들에 젠더를 '세뇌'시킨다"며 강하게 비난했다. 보수 일간지 '라베리타(La Verità)'는 이 조사를 "미친 성 이데올로기"라고 불렀다.
시모네 필론(동맹) 상원의원은 "이번 설문은 사실상 성적 유동성을 자극시키기 위한 것이다. 청소년들에게 상당히 위험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유권자들을 향해 설문을 시행하기 위해 배정된 공적자금의 출처와 액수를 확인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논란이 확산되자 마르코 부세티 교육장관은 즉각 설문조사를 중단시켰다.
이탈리아 뿐만이 아니다. 성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젠더'의 개념은 유럽 전역에서 철퇴를 맞고 있다.
지난해 8월 불가리아 교육부는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유네스코)의 성평등 교육 프로젝트를 무산시켰다. 작년 10월 헝가리 정부는 대학에서의 '젠더 연구'를 전면 금지하는 조치를 내렸다. 독일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도 2017년 총선에서 대학 내 젠더 학문에 대한 국가지원금 지급, 임용, 연구의 전면 중단을 약속했다. 당시 AfD는 13.3%를 득표하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독일 연방의회에 발을 들인 극우정당이 됐다.
작년 12월 스웨덴에서는 예테보리 대학 소속 스웨덴 젠더연구국(Swedish Secretariat for Gender Research)에 수상한 소포가 도착해 사람들이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3달 전 치러진 9월 총선에서 극우 '스웨덴민주당'이 17.6%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제3당으로 떠오른 후였다.
◇왜 이들은 '젠더학'을 공격하는가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가 주장하는 '자유 민주주의'는 극우가 원하는 사회의 지향점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는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값, 즉 정상은 여성과 남성이 만나 꾸린 가족이라고 주장한다. 중요한 요소가 하나가 더 있다. 이 가족을 이끄는 이는 늘 '남성'이어야하며 이에 따라 남성은 구성원 내에서 견고한 권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성(性)인 '젠더'와 고정적인 성역할이 없다고 주장하는 '페미니즘'은 이들의 사상을 단번에 무너뜨린다. 젠더를 연구하는 이들은 사람의 성적 취향을 결정하는 것은 사회적 질서와 환경이라고 설명한다. 성을 생물학과는 상관없는 선택의 문제로 치환하며 전통적인 민족주의 개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가족이란 남성과 여성 뿐만이 아니라 여성과 여성, 남성과 남성이 만들어도 무방하다고 주장한다. 남성의 권위에도 타당성은 사라진다. 이 질서의 전복을 극우는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나 더욱 근본적인 목적은 따로 있다. 바로 ‘표심’이다. 젠더와 페미니즘 이슈는 선거에서 유권자들을 집중시킬 수 있는 좋은 잿밥이다. 미국 시사매체 애틀란틱은 극우주의자들이 젠더 이슈를 서구 자유주의의 상징으로 치환시키며 유권자들을 결집시키는 데 활용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탈리아 베로나 대학의 마시모 프레아로 정치학 교수는 “젠더 연구는 전쟁터가 됐다”고 현 상황을 분석했다. 그는 “최근 5년 동안 젠더 연구는 유럽 보수기독교 집단이 공격하던 지엽적인 문제에서 확장되며 사회 중심 문제로 떠올랐다”고 말했다.
◇젠더, 차단해야 할 외래 문화가 되다
외래어인 '젠더'라는 어휘가 지닌 힘도 무시할 수 없다. 바르샤바 대학의 아그니에슈카 그라프 젠더학 교수는 "폴란드에서 '젠더'라는 단어는 폴란드의 전통적인 성 문화를 오염시킨, 퇴폐적인 현대 서구 문명이라는 인식이 강하다"고 설명했다.
폴란드에서 최초로 젠더 연구가 시작된 것은 1990년대 초다. 그라프 교수는 "당시 연구자들은 사회적으로 거부감을 일으킬 수 있는 '여성학' 혹은 '페미니즘'이라는 표현 대신 ‘'더'라는 어휘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젠더라는 단어에는 서구화와 유럽화, 현대화에 대한 상징이 담긴 셈이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그러나 20년이 지난 현재 '젠더'는 악마의 단어가 됐다"고 덧붙였다.
보수 기독국가일수록 극우 정치인들의 젠더 혐오 발언은 큰 힘을 발휘한다. 민족주의는 종교적 근본주의와 결합해 공고한 한 축을 구축한다. 극우 정치인들은 전통적인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위협하는 젠더라는 개념이 가족과 아이들을 해치고, 결국 사회를 위기로 몰아넣는다고 주장한다.
"성소수자(LGBTQ) 운동은 가족과 아이들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다"는 폴란드 집권당인 극우 '법과 정의당(PiS)'의 야로슬라프 카친스키 대표의 발언이 대표적이다. 이탈리아 동맹 소속의 장관 3명은 최근 기독교 단체 행사에 참석해 "본연의 가족(natural family)을 지켜내는 데 앞장 서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들의 발언은 표를 지키기 위해 정치인들이 젠더 담론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이탈리아 학교에서 설문조사를 진행했던 바티니 교수는 "극우는 젠더와 젠더 이론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이 모든 것은 두려움에 대한 자극이다"고 말했다.
◇젠더학, 가장 먼저 전선에 들어왔을 뿐
문제는 이들의 통제가 단순히 젠더 연구의 억압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젠더가 가장 먼저 극우의 목표가 된 것은 이들이 공격하기 쉬운 조건을 갖춘 분야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곳곳에서 극우 정권을 위협하는 학문에 대한 억압과 감시가 시작되고 있다.
'브라질의 트럼프'라 불리는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교육 현장에서 좌파 사상을 주입할 수 없도록 감시하는 방안을 최근 승인했다. 브라질 당국은 학생들에게 좌파가 의심되는 교사의 수업을 촬영해 제보할 것을 장려했다. 올해 3월 네덜란드 극우 자유당은 대학과 중고등학교에 긴급 직통 전화를 설치해 좌파 논리를 교육하는 이들을 신고하도록 했다.
바르샤바 대학의 그라프 교수는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연구하고 읽어온 학문을 다루고 있다"며 그들의 젠더 연구가 학계 밖의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한다면 결국 대중은 최악의 적으로 돌아설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라프 교수는 "우리가 비난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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