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정순민 칼럼 ] 어느 자영업자의 초상

정순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6.26 17:14

수정 2019.06.26 18:42

영화 기생충 주인공 기택씨 
두 번의 창업, 두 번의 폐업
그는 다시 일어설수 있을까
[정순민 칼럼 ] 어느 자영업자의 초상
920만명. 지금 추세대로라면 천만에 턱걸이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 아닐 듯하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기생충' 얘기다. 예술영화의 산실인 칸영화제 수상작이 흥행에서도 대박을 터뜨리는 건 사실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영화배급사인 CJ ENM의 측면지원이 흥행에 영향을 줬겠지만 영화 자체의 힘이 없었다면 이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누가 뭐라 해도 이번 영화의 주인공은 송강호가 연기한 '기택'이다. 영화에 따르면 기택씨는 서울 변두리 반지하에 사는 50대 중반의 가장이다.
그에게는 불만 가득한 아내와 대학 입시에 실패한 아들, 딸이 있다. 네 식구는 현재 공식적인 경제활동을 하고 있지 않다. 말 그대로 '백수' 가족이다. 기택씨가 직장 생활을 한 적이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는 두 번의 창업과 두 번의 폐업을 경험한 자영업자 출신이다. 대한민국 자영업의 대명사나 다름없는 치킨집을 한 적이 있고, 한때 창업붐이 불었던 대만 카스테라로 갈아탔다가 쫄딱 망했다.

대한민국 자영업은 '을(乙)의 전쟁터'다. 누군가 실패하고 나간 자리에 새로운 경쟁자가 들어와 실패를 반복한다. 여기서 버텨내면 그럭저럭 삶을 꾸려갈 수 있지만 삐끗하면 햇볕도 들지 않는 지하로 굴러떨어진다. 기택씨가 운전기사로 취직한 박 사장집 지하에 숨어사는 근세(박 사장집 가정부의 남편)가 그런 존재다. 그도 대만 카스테라에 손을 댔다가 큰 빚을 졌다.

대한민국은 자영업 비중이 꽤 높은 나라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 자영업자 비중은 전체 취업자의 25.4%를 차지한다. 근로자 넷 중 한 명은 자영업 종사자다. 이는 OECD 평균인 17.0%를 크게 웃도는 수치로, 일본(10.4%)이나 미국(6.3%)의 2~4배 수준이다. 자영업자 수를 단순비교해도 한국은 OECD 국가 중 최상위권이다. 한국 자영업자 수는 556만명으로 미국(1299만명), 멕시코(1172만명) 다음으로 많다.

몇 해 전 현대경제연구원은 '자영업자의 10대 문제'라는 보고서를 낸 적이 있다. 이에 따르면 대한민국 자영업은 △양적 과다 △다진입·다퇴출 △준비 없는 창업 △자영업자 간 경쟁 과다 △영세화 △짧은 생존기간 △가계부채 누증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최근 한국은행이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올 1·4분기 말 현재 자영업자 대출잔액은 무려 636조4000억원에 이른다. 이는 1년 전에 비해 11.2% 늘어난 수치다. 빚이 는 것도 문제지만 이를 갚을 능력이 없다는 건 더 큰 문제다. 특히 최근 최저임금 인상으로 직격탄을 맞은 도소매업 및 숙박음식업의 경우 채무상환 능력이 급격히 악화되고 있다.

빚이 있을망정 가게를 유지하고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영화 속 기택씨처럼 두 번의 폐업을 경험하면 지상도 지하도 아닌 반지하에서의 삶이 불가피하다. 국토교통부의 2018년 주거실태 조사 자료에 따르면 전국 가구의 2% 안팎인 40만~50만가구가 반지하에서 산다. 이를 인구수로 환산하면 200만명이다. 지난 1960~70년대 개발시대에 탄생한 반지하 주택의 95%는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지역에 밀집해 있다.

영화 후반부 기택씨는 홀연히 사라진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 그가 박 사장 집 지하로 숨어든 사실이 밝혀진다. 반지하에서 다시 지하로 내려간 그는 그곳에서 탈출해 가족과 재회할 수 있을까. 마지막 남은 방법은 딱 한 가지, 아들이 돈을 많이 벌어서 그 집을 사면 된다.
그런데 그 가능성은 과연 얼마나 될까. 이 영화가 등골 오싹한 공포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jsm64@fnnews.com 정순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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