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정순민 칼럼] "라떼 이즈 어 호스"

정순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10.02 17:26

수정 2019.10.02 17:26

해외언론까지 주목한 꼰대
"나 땐 말야" 입에 달고살아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해야
[정순민 칼럼]
난센스 퀴즈부터 하나 풀어보자. '라떼 이즈 어 호스(Latte is a horse)'는 과연 무슨 뜻일까. 라떼는 말이다? 직역하면 이런 뜻일 터인데, 이게 정답일 리 없다고 생각되면 인터넷 검색을 통해 답을 찾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다. 아니면 주변에 있는 누군가에게 물어봐야 하는데, 되도록이면 젊은 사람에게 물어볼 것을 정중히 권유한다. 나이가 많으면 많을수록 정답을 맞히지 못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정답은 "나 때는 말이야∼"다. 인터넷에는 "꼰대들의 입버릇인 '나 때는 말이야'를 비꼰 신조어"라는 설명이 곁들여 있다. 실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도 이 말을 몰랐다.
내가 처음 이 단어를 알게 된 건 영국 공영방송 BBC를 통해서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BBC가 '오늘의 단어'로 '꼰대(KKONDAE)'를 선정했다는 인터넷 뉴스를 접하고서다. BBC는 꼰대란 "자신이 항상 옳다고 믿는 나이 많은 사람"이라고 정의한 뒤, 이런 사람을 알고 있으면 사례를 올려달라는 글을 덧붙였다. 그랬더니 자그마치 720여개의 댓글이 달렸다. 그중 하나가 '라떼 이즈 어 호스'다. 한글 사용자가 아니라면 알 수 없는 이두식 음차(音借)다.

사이버 공간에 들어가보면 내가 꼰대인지 아닌지 판별할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자가진단표'가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사람을 만나면 나이부터 확인한다. 헬조선이라고 말하는 요즘 세대가 참 한심하다. "내가 왕년에" 같은 말을 자주 한다. 나보다 일찍 퇴근하는 후배가 눈에 거슬린다. 내 의견에 반대하는 후배를 보면 화가 난다. 기존 방식을 고수할 때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어린 친구가 뭘 알아'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다. '나이가 들면 지혜로워진다'는 말에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다. 만약 이 중 한두 가지라도 해당된다면 당신은 이미 꼰대 반열에 올랐다고 보면 맞다.

아프리카 속담에 '죽어가는 노인(Old Man)은 불타는 도서관과 같다'는 말이 있다. 과거 나이든 사람은 '지혜의 창고'로 여겨졌다. 지혜란 나이 많은 이에게서 젊은이에게로 전해지는 소중한 자산으로 여겼다. 그런 지혜의 전승을 통해 이 사회와 국가가 지탱되는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은 믿었다. 그러나 이는 이미 낡은 생각이 되어버렸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턴가 나이든 사람을 달가워하지 않는 '혐로(嫌老)사회'가 됐다. 이렇게 된 데는 사실 꼰대라고 손가락질 당하는 이들이 그런 사태를 스스로 유발한 측면도 없지 않다. 자업자득이다.

조롱의 대상이 된 이들은 자신이 뒷담화의 주인공이 됐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자신이 비난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거니와, 설혹 작은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그걸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내가 항상 옳고, 상대방은 늘 틀렸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자기중심적이고 타인과 소통하지 못하는 이들이 나이 들면 대개는 꼰대로 전락한다. 지난 5월 BBC에 앞서 꼰대 관련 기사를 다룬 영국 경제지 '이코노미스트'는 '젊은 사람들로부터 의심의 여지 없이 복종을 기대하는 사람'과 '비판은 빠르지만 자신의 잘못은 절대 인정하지 않는 사람'을 대표적인 꼰대 캐릭터로 지목했다.

오스트리아의 소설가 마리 폰 에브너 에센바흐는 "어떤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변화하고, 어떤 사람은 그대로 굳어버린다"고 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은 '변화'다.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젊은이들에게 따돌림 당하는 꼰대가 될 수도 있고, '불타는 도서관'과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최근 '조국 사태'를 지켜보면서 꼰대가 되는 건 한순간이라는 생각을 문득 해본다.

jsm64@fnnews.com 정순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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