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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허수경이 남긴 문단 선후배에 대한 애정어린 단평들

뉴시스

입력 2019.10.08 11:30

수정 2019.10.08 18:24

김훈, 김혜순, 최승호, 문태준, 김민정, 김이듬, 신용목, 박준, 이광호 등 눈시울 적시는 연민의 감성
허수경 시인 (사진=출판사 난다 제공)
허수경 시인 (사진=출판사 난다 제공)
【서울=뉴시스】신효령 기자 = 붙잡지 못해 멀어지는 순간들이 있다. 함께 겪은 일도 각자의 시간 속에서는 다르게 기억된다.

지난해 10월 3일 세상을 떠난 허수경 시인은 유고집 '가기 전에 쓰는 글들'에서 명징한 기억력으로 개인적 추억을 풀어냈다. 선후배 문인들에 대한 절절한 마음이 그것이다. 우선 허 시인은 자신의 시집을 만들어준 편집자이자 아끼는 후배였던 김민정 시인에 대한 고마움을 일기에 썼다.

"민정이 보내준 난다 노트 한 권을 꺼내들고 나는 쓰기 시작했다.
몇 편의 시가 나에게 남아 있는지 나는 아직 모르겠다. 가기 전에 쓸 시간 있다면 쓸 수 있을 것이다. 내일, 내일 가더라도. 그리고 가야겠다. 나에게 그 많은 것을 준 세계로. 그리고, 그리고, 당신들에게로."(2018년 4월 15일)

문단 선배인 김훈에 대한 언급도 있다.

"김훈 선배의 말들은 이제 그가 가려고 했던 모든 길을 걷다가 가고 싶었던 어떤 길에 도달한 느낌이다. 오늘 그가 운동을 하면서 전화를 했을 때 나는 그가 자신의 길을 완성하려고 하는 마지막 아주 긴 시간을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2011년 12월 3일)

다음은 김혜순 시인에 대한 언급.

"그녀를 생각한다. 우리 시대 최고의 시인 김혜순. 나에게 외롭지 말라고 하던 심심해하지 말라고 하던 시인. 그녀의 말들은 외로운 사람의 말, 고독한 최고 시인의 말. 나는 그녀의 말을 사랑한다."(2011년 12월 25일)

문태준 시인은 새 시집의 뒤표지 글을 허수경에게 부탁했던 모양이다.

"문태준 시인의 새 시집에 들어갈 뒤표지 글 부탁을 받고 새 시들을 받았다. 우선 일별. 통풍이 잘되는 시. 좋은 시. 좋은 시라는 모범이 될 만한 시. 문득 문태준 시인이 혹, 러시아 시인들의 시를 많이 읽지는 않았는지, 하는 생각이 든다."(2012년 1월 19일)

"태준의 시에서 나는 하이쿠의 냄새. 그의 시들을 읽고 난 뒤 나는 운동화 끈을 질근 묶고 들판으로 달리기를 하러 나간다. 그 냄새가 너무 좋다.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 그가 그 길로 가리라는 거. 타인을 설득하지 않으려는 시적 태도는 너무나 좋다."(2012년 1월 22일)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로 유명한 박준 시인에게도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박준 시집의 해설 제목을 '준이를 위한 발라드'라고 붙이는 건 어떨까."(2012년 5월 8일)

시집 '아무 날의 도시'를 낸 신용목 시인과의 교감도 눈길을 끈다.

"용목의 시집을 읽는다. '아무 날의 도시'. 처음 그 제목을 들었을 때 그런가보다 했는데 시집을 읽으니 정말 시집에 걸맞은 제목이라는 생각. 흐린 날, 소포를 부치고 국수로 점심을 먹고 오후의 라디오를 듣는다."(2012년 11월 7일)

송재학과 김이듬 시인에 대한 언급은 짧막한 시평을 연상케한다.

"어제 읽은 송재학 선생의 시들에서 옛 선비의 단아한 문장들이라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문장들을 발견했다. 너무나 황홀한 문장들. 그 문장들은 스미는 힘이 있어서 참 좋았으나 아프지는 않았다. 아니라면 너무 아파서 그 흔적이 보이지 않는 걸까. 김이듬의 시들을 읽었다. 그가 쓴 시들은 아프다. 하지만 너무 아파서 힘을 잃는다. 아마도 내가 서울에서 쓴 시들이 그랬으리."(2012년 11월 8일)
(출처=뉴시스/NEWSIS)
(출처=뉴시스/NEWSIS)
다음은 최승호, 이향, 이성복 시인과 문학평론가 이광호에 대한 언급이다.

"최승호 선배의 시집 '허공을 달리는 코뿔소'를 정독했다. 아마도 최선배는 이 시집에서 시의 완성도라는 시적 자유를 속박하는 모종의 것들과 이별을 한 게 아닌가 싶다. 시작 노트에 든 글들을 이렇게 척. 멋지다. 이런 과감한 자유에의 의지가 시를 창조적으로 만들어가는 근원이 아닌가 싶다."(2013년 3월 26일)

"이향 시인의 시집 '희다'는 무척 정갈하다. 나는 그이의 시집이 좋다. 약력을 보니 나와 같은 나이. 이게 세대의 친밀함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2013년 3월 26일)

"이성복: 그것은 허구이지요. '마치 ~처럼' 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허구로서의 진실이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보호하고 삶을 기획하게 합니다. 시라는 것도 그런 것이 아닐까요. 삶 자체가 허구라면, 시는 허구 속의 허구입니다. 그런데 이 허구 속의 허구를 만들어서 삶이라는 허구를 뒤집거나 혹은 무화시키는 것, 그런 것이 시겠지요.('문학동네' 2013년 여름호, 46쪽)"(2013년 7월 1일)

"이광호씨의 책 '사랑의 미래'를 정독했다. 시와 에세이, 그리고 소설이 교차하는 글이라고 그가 정의했으니 나도 그냥 '이광호의 책'이라고 부른다. 이 책은 문장들을 환기하는 힘이 있다.
"(2014년 4월 7일)

한때 단짝처럼 붙어다녔던 신경숙과 이병률 시인은 허수경을 만나기 위해 독일까지 갔던 모양이다.

"경숙과 병률이 다음주에 온다.
온다, 라고 쓰고 보니 간다, 라는 말이 먼저 떠오르네. 삶은 아직 가는 것을 사유할 만큼 젊구나. 그건 좋은 일이야."(2014년 4월 11일)

허수경은 누구인가. 유고집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허수경의 인간적 품성과 자상한 모성애를 가감없이 보여준다.

snow@newsis.com <저작권자ⓒ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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