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기자수첩

[기자수첩]이세돌은 지지 않았다

최용준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12.23 16:39

수정 2019.12.23 16:39

[기자수첩]이세돌은 지지 않았다
죽다 살아났다고 말할 만한 일이 있다. 대학 졸업하고 1년 동안 외국을 돌아다녔다. 혼자 여행하는 것은 괜찮았는데 혼자 아픈 건 힘들었다. 페루에서 소매치기를 당하고 홧김에 먹은 치킨이 문제였다. 덥고 습한 해변도시에서 식중독으로 몸이 덜덜 떨렸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이를 딱딱 마주치며 웅크렸다.
눈물이 절로 흘렀다. 너무 아파서, 너무 외로워서.

4일 동안 앓아누워 우울했다. 사람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누구라도 좋으니 위로받고 싶었다. 서러움이 복받쳐 친구에게 전화하려고 스마트폰을 켰다. 이세돌과 구글 바둑 인공지능(AI)인 알파고 제2국 생중계가 펼쳐졌다. 이세돌은 바둑판만 보았다. 이따금 미간을 찡그렸다. 수 싸움에 불리하다, 승부를 건다는 말들이 오갔다.

지구 반대편에서 이세돌을 응원했다. 인간 대표로 오른 그가 나처럼 외로워 보여서 그랬다. 구토와 설사를 반복하면서. 어지러워 눈을 감고 바둑판에 바둑알이 탁 오르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가 두는 바둑은 어떤 위안이었다. 혼자서 한 수 한 수 최선을 다하는 모습. 어쩐지 식중독이 나을 것 같은 심정이었다. 이 정도 아픔은 견뎌야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지난주 이세돌이 은퇴했다. 그는 마지막 대국 상대로 NHN 바둑 AI 한돌을 택했다. 1승 2패로 마무리됐다. 결과와 상관없이 감동적이었다. 그는 승부에 앞서 "제 바둑을 두겠다"고 했다. 그 말은 꼭 '지지 않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마지막 승부에서 반드시 AI를 이기겠다는 말과는 결이 달랐다.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소설가 김연수는 '지지 않는다는 말'에서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지지 않는다는 말이 반드시 이긴다는 걸 뜻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고 썼다. 이긴다는 말은 상대방을 누른다는 뜻에 가깝게 느껴진다. 반면 지지 않겠다는 말은 자신에게 달려 있는 감정 같다.

이번 대국에서 한돌 실시간 승률 그래프는 계속 움직였다.
AI는 승부를 확률로 인식하지만 이세돌은 달랐다. 때로 인간은 기계와 달리 스스로에게 지지 않기 위해 싸우는 것 같다.
그래서 이세돌 어록이 자꾸만 생각난다. "자신이 없어요. 질 자신이." 다시 말해 지지 않을 자신(自信)이 있다는 말.

junjun@fnnews.com 최용준 산업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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