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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은 문화다]'유희하는 인간'에게 게임은 '본능'…"21세기 놀이문화"

뉴스1

입력 2019.12.31 12:15

수정 2019.12.31 12:15

지난 11월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국제게임박람회 '지스타 2019'에서 부모와 자녀들이 함께 게임을 체험하고 있다.© 뉴스1
지난 11월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국제게임박람회 '지스타 2019'에서 부모와 자녀들이 함께 게임을 체험하고 있다.© 뉴스1


2018년 한국 게임 수출액·수입액 © 뉴스1
2018년 한국 게임 수출액·수입액 © 뉴스1


지난 11월 30일과 12월 1일 이틀간 경기도 성남시 판교 사옥에서 개최한 제8회 네코제(넥슨콘텐츠축제)에서 예술감독을 맡은 가수 하림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넥슨 제공).© 뉴스1
지난 11월 30일과 12월 1일 이틀간 경기도 성남시 판교 사옥에서 개최한 제8회 네코제(넥슨콘텐츠축제)에서 예술감독을 맡은 가수 하림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넥슨 제공).© 뉴스1

(서울=뉴스1) 남도영 기자 = "허락보다 용서가 쉽다."

아내에게 허락을 받고 사는(buy) 것보다 사고 나서 용서를 구하는 게 더 쉽다는 이 문구가 '어른이'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지난 1월 소니의 콘솔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4'를 30% 이상 할인해 판매한 이른바 '플스 대란'이 벌어지자 매장 문을 열기 전부터 30~40대 남성 수백명이 줄을 서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평소 "게임에 예산을 내줄 수 없다"는 '재무부 장관'(부인) 몰래 5000원, 1만원씩 용돈을 모아 플스를 장만했다는 직장인 A씨(40)는 "친한 친구에게 게임기를 샀다고 말하니 어린애냐고 핀잔을 들었다"고 털어놨다. 그런데 막상 집에 놀러 온 친구는 같이 온 자신의 아들은 제쳐놓고 '게임 삼매경'에 빠졌다.

직장인 B씨(38)에게 게임은 '추억'이다. 과거 '파이널판타지'와 '크로노트리거' 같은 롤플레잉(RPG) 게임들이 준 여운이 늘 가슴 속에 남아 있다는 그는 직장 생활과 육아에 치여 게임기에 손 댈 시간이 거의 없지만 틈틈이 모바일 게임을 즐기며 언젠가 '복귀의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집에 오면 게임으로 스트레스를 푼다는 자영업자 C씨(37)는 자녀들에게도 '마인크래프트' 같은 게임을 가르쳐주고 있다. 그는 "게임을 시작하면서 평소에 술을 마시거나 늦게 들어오는 일이 없어졌다"며 "아이들도 게임을 통해 규칙을 배우고 자유롭게 상상하며 창의력을 키울 수 있다"고 '게임 예찬론'을 펼쳤다.

오락실에서 '갤러그'와 '스트리트파이터2'를 즐기고 PC방에서 친구들과 '스타크래프트'와 '바람의나라'로 우정을 쌓으며 자라 온 세대에게 게임은 어른이 돼서도 사라지지 않는 '본능'이다. 부모님 눈을 피해 게임을 하며 자란 이들이 사회에 진출하고 가정을 꾸리면서 더 이상 게임은 '아이들의 전유물'이 아니게 됐다.

◇21세기 최고의 엔터테인먼트는 '게임'

일찍이 '호모루덴스'(유희하는 인간)를 제창한 역사학자 하위징아는 놀이는 인간의 근원적인 활동이며, 놀이가 인류의 문화를 꽃피우게 한다고 주장했다. 이제는 '호모게임스'로 칭해도 될 만큼 현 세대에게 게임은 가장 친숙한 놀이 문화로 자리잡고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스타티스타에 따르면 2018년 미국 전체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비디오 게임은 음악, 영화, 홈 비디오 등을 제치고 가장 큰 매출을 기록했다. 미국 소비자들은 비디오 게임을 즐기는 데 영화 관람이나 음반 구매의 3배 이상의 돈을 지출했다.

국내 콘텐츠 시장 역시 게임이 주도하고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최근 발간한 '2019 대한민국 게임백서'에 따르면 2018년 기준 국내 게임시장 규모는 14조2902억원을 기록했으며, 올해는 15조원을 돌파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이미 음악과 영화 시장을 합친 것보다 큰 규모다.

넥슨, 엔씨소프트, 넷마블 등 국내 게임사들은 조단위 매출을 올리는 대기업으로 성장해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하고 있으며, 최근까지 펍지(PUBG), 펄어비스 등 글로벌 수준의 개발력을 갖춘 게임 개발사들이 배출돼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K-게임'은 국내 뿐만 아니라 글로벌 무대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콘진원의 '2018년 하반기 및 연간 콘텐츠산업 동향분석보고서'에 따르면 2018년 국내 콘텐츠 산업 수출액은 95억5000만달러로 이 중 게임 산업은 66.9%를 차지했다. 게임 콘텐츠 수출액은 63억9161만달러로 'K-팝'으로 승승장구 하고 있는 음악(5억6517만달러) 산업의 10배 이상을 기록했다.

◇전 세대 아우르는 '게임문화' 정착 시급

이렇게 국가대표급 문화 콘텐츠 산업으로 성장한 게임산업의 위상과는 다르게 게임을 학생들의 학업 성취를 방해하고 도박, 마약과 같이 일상생활을 파괴하는 '일탈'로 바라보는 시각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성인들조차 게임을 즐기는 데 '허락'과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농담 섞인 말을 할 만큼 사회 전반에는 아직도 게임을 대중적인 문화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남아있다.

특히 올해 5월 세계보건기구(WHO)가 스웨스 제네바에서 열린 총회에서 '게임이용장애'(gaming disorder)를 질병 항목에 포함시킨 국제질병표준분류기준(IDC) 11차 개정안을 통과시키면서 게임을 '중독물질'로 보는 부정적인 시각에 다시 불이 붙은 상황이다.

WHO의 게임이용장애 질병코드 등재를 두고 국내에선 격론이 벌어지고 있다. 게임 업계와 학계에선 게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확산하고 산업 성장을 가로막는 과잉 규제의 근거가 될 수 있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반면 의료계에선 게임 과몰입에 대한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질병코드 등재가 필요하다며 지지의사를 밝히며 양측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일각에선 중독과 같은 게임에 대한 부작용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전 세대가 향유하는 '문화로써의 게임'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그동안 '게임산업'은 유망산업으로 주목받으며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가장 대중적인 놀이가 된 '게임문화'를 키우는 데는 소홀했던 게 게임을 둘러싼 사로회적 갈등의 근본 원인이라는 지적이다.


이 같은 논의를 주제로 지난 7월 열린 '게임, 문화로 말하다' 게임문화포럼 오픈세미나에서 나보라 성균관대 초빙교수는 "오늘날 게임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과 논란의 양상은 우리 사회의 게임에 대한 이해와 고민이 충분했는지 돌아보게 한다"며 "그동안 한국 게임사에서 정작 좋은 게임이 무엇인지, 게임이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논의는 빠져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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