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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에서]자율주행차 '뽑기'

오승범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01.20 16:41

수정 2020.01.20 16:41

[여의도에서]자율주행차 '뽑기'
조선시대 임금은 매일 제비뽑기를 했다. 오후에 병조 참의(현재 국방부 차관보) 또는 참지(병조에만 있던 정3품 당상관) 중 한명이 밀봉된 봉투 3개를 올리면 임금이 그중 하나를 골라 확인한 후 돌려줬다. 한자 3자 이내로 된 군호(軍號)로 현재의 암호다. 2경(밤 10시)부터 5경(새벽 4시)까지 통행금지되는 도성 등 수도 한양을 지키는 군사들의 피아식별이 임금의 손에 달렸었다.

조선의 제5대 임금 문종이 편찬한 '오위진법'의 진중 군법에 의하면 진중에서 야간 통행금지를 어기고 군호를 잊어버린 자는 목을 베었다. 어려운 한자가 담긴 3자의 군호가 발령되면 까막눈 군사들은 외우는 데 애를 먹었다.
임금의 단순한 선택이 군사들에겐 생사가 걸린 중대사였던 셈이다. 이 때문에 임금도 부담감이 컸으리라 짐작된다. 그래서일까. 일부 임금은 쉬운 한자로 된 2자의 군호를 직접 써주기도 했다. 고르든 작성하든 이 역시 임금의 몫이었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한 나라의 군왕도 피해갈 수 없었던 게 원초적 선택방식인 제비뽑기였다.

오늘날 제비뽑기는 자동차업계에서도 통용된다. 소위 '뽑기'로 불린다. 잦은 고장 등을 일으키는 새차가 걸리면 두고두고 고생한다는 부정적 의미가 강하다. 실제 비슷한 경험을 토로하는 지인들도 있다. 새차의 품질 문제로 속끓는 소비자들이 업체로부터 어렵지 않게 듣는 말도 "뽑기를 잘못하셨네요"이다. 자동차 관련 인터넷 사이트를 조금만 돌아다녀도 관련 내용을 쉽게 볼 수 있다.

지금이 어느 시기인가. 내연기관 시대가 저물어가고, 완전자율주행차 기반의 미래 모빌리티 시대의 개막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예측할 수 없고, 운으로 결정되는 복불복 식의 뽑기라는 말이 자동차업계에선 용인되는 분위기다. 마치 "그럴 수도 있지"라는 오만함마저 느껴진다. 오히려 기업 스스로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지난 2010년부터 2015년까지 접수된 자동차 시동 꺼짐 사례는 702건에 이른다. 이 중 교환이나 환급받은 비율은 고작 4.7%이다. 말 그대로 보상은 산 넘어 산이다. 신차에서 동일 하자가 반복될 경우 중재를 통해 교환 또는 환불해주는 레몬법이 시행된 지 1년이 지났지만, 진행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다. 심지어 P사 등 일부 수입차 브랜드는 레몬법을 수용하지 않고 버티고 있다. J사는 색상이 다른 차를 소비자에게 인도한 후 모르쇠로 일관하다가 최근 소송에서 패소해 도색비용 800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현재 국내 자동차업계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업체들의 행태가 이러할진대 다가올 완전자율주행차 시대는 어떨는지 기대보다 우려가 앞선다. 생각만 해도 간담이 서늘해지지만 완전자율주행차는 센서 하나의 작은 오작동에도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예측 불가다. 고장률이 0.01%라 해도 100만대이면 100대다. 즉 100명의 목숨은 운에 맡겨야 한다. 따라서 한 치의 오차 없이 무결점으로 출고돼야만 믿고 탈 수 있는 게 완전자율주행차다.
낡은 사고방식의 뽑기가 자동차 업계에서 사라져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무엇보다 고객 불신과 리스크를 자초하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한 치열한 분투가 숙명인 기업의 이미지에도 치명적이다.
새로운 10년이 시작되는 2020년대에는 뽑기의 종식을 고하고 무한 고객신뢰의 완전자율주행차 시대가 열리길 앙망한다.

winwin@fnnews.com 오승범 산업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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