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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에서] 리더의 조건

안승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01.23 16:11

수정 2020.01.23 16:11

[여의도에서] 리더의 조건
각 나라의 수장들이 마주하는 정상회담 장면을 보면 양국 대통령들 옆에 그야말로 '찰싹' 붙어서, 손에 든 수첩에 연신 무엇인가를 바삐 적고 있는 인물들이 항상 등장한다. 이들은 바로 통역 담당인데, 회담을 나누는 정상들보다 양쪽의 통역이 더 긴장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회담 뉴스의 또 다른 재미다.

보통 양국 정상들이 회담을 나눌 때는 당사자들의 외국어 실력과 상관없이 통역이 배석하는 것이 국제관례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한 의사전달이 중요한 데다, 통역을 하는 사이에 대통령이 대답을 생각할 시간을 벌어주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대화 장면을 보면 우리 쪽 통역이 문 대통령의 말을 영어로 전달하고, 트럼프 대통령의 말을 그쪽 통역이 다시 한국어로 말해주는데, 이를 순차 통역이라고 한다. 정상회담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방식인데, 이렇게 회담이 진행되다 보니 두 정상이 30분을 만나면 사실상 대화시간은 10분도 안된다.
이러다 보니 과연 양국 정상들이 속내에 있는 얘기를 진짜로 나눌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게다가 통역의 실수로 의사가 잘못 전달되어, 이를 수정하는 해프닝도 외교가에서는 종종 생긴다고 한다.

모든 정치 지도자들이 영어에 능통하지도 못하고, 그래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어느 정도 외국어 능력이 뒤따라 준다면 피 말리는 외교무대에서 상대방에 비해 유리한 입장에 설 것은 틀림없다.

고 김대중 대통령이나 김영삼 대통령은 상당한 수준의 일본어 실력 덕분에 한·일 외교무대에서 오히려 통역의 실수를 바로잡았다는 일화도 있다.

최근 박원순 서울시장의 미국 순방을 다녀왔다.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박 시장의 영어회화 실력은 상당한 수준이다. 외워서 하는 영어연설 정도가 아니라 다국적 패널들과 국제회의를 통역 없이도 주재할 정도의 실력이다. 해외순방 때마다 열리는 환영만찬에서는 참석자들과 영어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박 시장은 과거 런던 정경대학에서 공부한 적도 있고, 미국 스탠퍼드에서는 강의를 한 적도 있다. 그런데 그의 영어 실력은 해외 경험을 쌓기 전에도 상당한 수준이었다는 게 주변 사람들의 전언이다.

일견 그게 뭐 대단한 일이냐고 넘길 수도 있겠지만, 도시외교에서 리더의 외국어 실력은 종종 큰 성과를 얻어낸다. 이번 미국 순방 중 실리콘밸리에서 열린 투자설명회에서 노던라이트 벤처캐피털로부터 1억달러의 투자를 즉석에서 약속받은 것도 박 시장의 막힘 없는 영어실력이 한몫했다.

박 시장은 해외 인맥들과의 교류를 특히 중시한다. 순방 때마다 주요 인사들을 만나면 꼭 서울을 방문해 달라고 요청한다. 직접 와서 보고 판단한 뒤 투자하라는 것이다. 이런 교류들은 곧 서울의 자산이 된다. 지금 서울이 의장을 맡고 있는 국제기구만 4개다. 이 중 세계스마트시티기구(WeGO)와 국제사회적경제협의체(GSEF)는 아예 박 시장이 주도해 만들어진 국제기구다.


영어를 잘해서 얻은 결과물은 아니었지만, 일일이 통역을 대동하고 다녀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쉽지 않았을 일이기도 하다.

박 시장은 이번 순방에서도 구글의 전 회장인 에릭 슈미트를 비롯, 굵직한 인사들을 만났다.
그들에게 무엇을 부탁했고, 그것이 어떤 선물로 서울에 돌아올지 자못 기대가 크다.

ahnman@fnnews.com 안승현 정책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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