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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나루] 사법부 신뢰 추락, 자업자득이다

김충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02.04 17:10

수정 2020.02.04 21:53

[여의나루] 사법부 신뢰 추락, 자업자득이다
지난달 30일, 대법원의 직권남용죄 판결이 있었다. 단순히 직권남용죄에 대한 첫 전원합의체 판결이라는 사실 외에도 주목을 받은 이유가 있었다. 박근혜 정권의 이른바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직권남용죄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판단이었기 때문이다. 결론은 직권남용죄에 대한 엄격한 해석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한마디로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는 단순히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하는 행위를 했다는 것만으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것'이 별개의 범죄성립요건이라는 말이다.

일부 언론은 블랙리스트를 주도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에게 유리한 판결이라는 해석을 내놨다.
내가 주목한 것은 곧바로 이어진 '다른' 해석이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등이 처벌될 때가 됐기 때문이라는 엉뚱한(?) 의견이 그것이다. 전 정권을 처벌할 때는 직권남용죄를 실컷 써먹더니 이제 조국 전 장관 등이 직권남용죄로 기소되자 사법부가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해 엄격한 해석을 내놨다는 말이다. 대법원 판결 기사에 딸린 댓글에 보이던 그런 해석은 이제 다른 곳에서도 많이 회자되고 있다. 몇 가지 인용하고 싶지만 험악한 내용의 댓글은 대부분 차마 칼럼에 노출하기 어려울 정도다. 댓글이 전체 여론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상당한 정도로 밑바닥 민심을 반영한다고 했을 때 사법 불신이 대단히 깊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모든 법원 판결은 비평의 대상이 된다. 특히 사실상 구속력을 갖는 대법원 판결에 대한 논평과 의견 교환은 활발할수록 좋다. 문제는 논리와 법리가 아니라 판결의 정치적 의도가 의심받는 지경에 이르는 경우다. 제 논에 물대기 식 판결 해석은 언제나 있어 왔다. 하지만 판결의 정치적 해석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현상은 현 사법부가 자초한 일이라는 사실이 더 심각한 문제다. 이른바 사법농단, 재판거래 의혹이 불거졌을 때 나는 법원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법원이 신성불가침이어서가 아니다. 검찰 수사를 통한 해결책은 사법부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언덕인 '국민의 신뢰'를 스스로 허무는 일이라 생각해서다. 법원이 자진해서 검찰의 칼에 몸을 맡기고, 검찰이 기소한 법관을 다른 법관들이 재판하는 모습. 참으로 기이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피고인 중에는 전직 대법원장, 대법관은 물론 현직 법관도 있다. 전직이든 현직이든 재판 대상인 법관들이 내린 결론에 순순히 승복할 국민이 있을까. 사법부 신뢰 추락은 그래서 자업자득이다. 자신이 지시해 구성한 조사단의 결론도 무시하고 법원에 대한 검찰 수사를 의뢰한 김명수 대법원장의 선택이 잘못됐다는 믿음이 여전한 것은 그 때문이다. 문제를 더 악화시키는 것은 그 같은 신뢰 추락에 핵심적 역할을 한 법관들의 선택이다. 청와대 비서관 등으로 진출한 데 이어 총선 출마를 서두르고 있다. 그들의 판결이나 사법부 독립을 외친 목소리의 정치적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사법부가 3권 중 가장 덜 위험한 권력이라고 봤다.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기 일쑤인 다른 권력과 달리 법원은 국민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고 봤다. 칼의 권력을 쥔 행정부, 돈의 권력을 쥔 입법부에 의해 상처받은 국민들이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피난처가 사법부여야 한다.
최후의 피난처, 믿을 수 있는 심판자가 사라지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모두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승부를 가르려 할 것이다.
그런 세상을 초래할지도 모르는 지금과 같은 사법부는 오히려 가장 위험한 권력 아닌가 싶기도 하다.

노동일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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