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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논단] 쇼군의 말에 올라타다

김충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03.02 17:30

수정 2020.03.02 17:30

[fn논단] 쇼군의 말에 올라타다
구보PD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차에 히치하이킹했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차(車)가 아니라 말(馬) 위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칼을 든 쇼군이라면 구로사와는 카메라를 들고 영화의 신(神)에게 돌진했던 표범 같은 쇼군이다. 구보씨는 그 표범과 함께 2월 한 달을 살았다.

데뷔작 스가타 산시로부터 들개, 살다, 라쇼몽, 7인의 사무라이, 거미의 성, 요진보, 천국과 지옥, 카게무샤, 꿈(夢)과 란(亂)을 다시 봤다.

모두 세상을 놀라게 했던 작품이다.
라쇼몽은 1951년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를 잡아챘고, 감독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긴 '7인의 사무라이'는 미국으로 건너가 '황야의 7인'을 낳았고, 최근엔 '메그니피센트7'으로 트랜스포밍됐다.

그의 영화들은 일본적이면서도 서양적이었다. 그의 영화 '거미의 성'과 '란'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와 리어왕을 철저히 일본식으로 각색했다. 그는 서양 영화인들이 최초로 존경한 동양인 영화감독이다. 대부의 코폴라, 스타워즈의 조지 루카스, E.T 스필버그, 모두가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지금도 세계 모든 영화학도들은 그의 영화 속 장면 장면들을 교본 삼는다. 구로사와 영화의 탁월함은 영상미학과 Movement다. 영화 Movie는 Movement를 뜻하는 라틴어 Dran에서 왔다. Drama도 Dran에서 왔다.

그의 영화 속에는 온갖 종류의 무브먼트가 밤하늘 불꽃놀이처럼 터진다. 란(亂)과 가케무샤를 보시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수백마리 말이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변화무쌍한 무브먼트는 상상 초월이다. 그들과 더불어 빛과 먼지와 색채와 그림자가 그의 카메라를 만나 빚어내는 영상미는 세상 어느 영화의 추종도 불허한다.

20대 땐 화가였던 그는 초기엔 휴머니즘적 인간과 삶의 의미를 탐구했다. 이후 화가적 기질은 영화에서도 펼쳐졌다. 영화 '꿈'을 보시라. 8개의 옴니버스드라마 속에 세상 모든 회화 사조들이 총람돼 있다. 누군가 그의 영화에는 베토벤이 들어 있다고 했다. 구보씨가 보기엔 베토벤과 더불어 셰익스피어, 고흐도 들어 있다. 구보씨는 구로사와야말로 세상의 모든 예술장르를 영화 용광로 속에 집어넣어 종합예술의 최고 경지로 끌어올린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지나친 완벽주의와 타협 모르는 고집, 과도한 제작비 집행으로 일본 영화계로부터 외면당한다. 1970년에는 영화를 못 만드는 사면초가에 부딪히자 자살까지 시도한다. '꿈'의 세번째 에피소드, 폭설 속에서 산을 오르다 쓰러진 사내는 자신이리라. 그를 구해준 설산(雪山)의 여인은 영화의 신이리라.

그는 1998년 9월 6일 세상을 떠났다. 다음 날 일본의 모든 신문들은 그의 죽음을 1면 톱기사로 내보냈다. 전대미문의 일이다. 히치콕이 관객과 전쟁을 벌였다면 구로사와는 영화의 신에 도전과 응전한 감독이다. 구보씨는 2월 한 달간 먹이를 찾아 정상을 기어오르는 한 마리 표범과 살았다. 그의 광기 어린 오타쿠 정신과 빛나는 예술혼에 도취해 살았다.


오늘 그의 말에서 내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는데 고속도로 화장실에서 마주쳤던 명문 하나가 떠올랐다. 독자들에게도 전파한다.


"살면서 미쳤다는 말 한번 들어보지 못했다면, 당신은 단 한번도 목숨 걸고 도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응진 경기대 한국드라마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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