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팬톡]

일본의 매뉴얼 붕괴와 즉흥주의


일본에 살면서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집 베란다와 1층 쓰레기장에 대형 바퀴벌레가 보이기 시작해 부동산 관리회사에 소독을 요청했다. 관리회사는 집주인을 대신해 모든 걸 관리한다. 집주인은 펀드 형식의 부동산 투자사이기 때문에 '오너상'(집주인)이라곤 하나, 흔히 예상하는 사람의 모습은 아니다. 개인으로선 실체가 그려지지 않는 부동산 투자사다. 관리회사 담당자 왈 "건물 전체에 대한 소독은 물론이고, 댁의 집에 대해서만 역시 소독은 어렵다." 그러면 "오너와 상의해 달라." 다음날 다시 전화가 왔다. "오너상과 상의해 봤지만 결론은 불가하다. 이유는 '전례'가 없기 때문이다."

"12년 된 아파트에 바퀴벌레가 나타났는데, 전례가 없어서 소독을 못해주느냐. 다른 아파트는 해준다더라"라고 반문했다. 그제서야 수화기 건너편의 음성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다른 곳 어디가 그러느냐. 어느 지역, 어느 맨션이냐." 그가 말한 '전례'가 불완전하다는 점을 건드린 것이다.

일본 사회를 보여주는 아주 작은 에피소드다. 흔히 일본을 매뉴얼 사회라고 부른다. 행동양식인 매뉴얼은 정해진 규칙과 전례를 중시한다. 매뉴얼은 일본의 고도경제성장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었고, 선진국형 신뢰사회로 가는 '약속의 교본'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매뉴얼은 다른 측면도 있는데, 그대로만 따르면 어쨌든 개인의 책임은 면피된다. 책임지기 싫은 개인의 속내도 매뉴얼 사회의 단면이다.

'전례가 없는' 코로나19 사태는 일본이 매뉴얼의 함정, 매뉴얼의 붕괴에 빠진 사건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어느 나라가 이 글로벌 전염병 사태에 당황하지 않았겠느냐만은, 특히 아베 내각은 우왕좌왕했다. 현재도 그렇다. 당초 일본은 중국 후베이성 우한에서 탈출시킨 자국민에 대해 코로나19 검사 후 자택귀가로 방침을 정했었다. 이유는 법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었다. 일종의 매뉴얼이다. 자칫하면 인권침해 소지에 휘말린다는 우려가 총리관저 회의석상에서 나왔다. 한국 등 여타 국가들이 격리방침을 내걸자 그제서야 급작스럽게 격리장소 물색에 나섰다. 반대로 승객과 승무원 3711명이 탑승한 크루즈선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에 대해선 '인권침해'에 가까운 선상격리 조치로 706명의 감염자를 양산했다.

기국주의를 따르는 외국 크루즈선박에 대한 영해 내 위기대응 매뉴얼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 들어가면 '책임'지고 싶지 않다는 판단이 컸다고 본다.

당초에 지난달 초 이 배가 입항했을 당시 '매뉴얼 부재'에도 탑승객 전원에 대해 코로나19 검사를 해 외국인은 즉각 출국조치를 내리고, 내국인은 일정기간 지상에서 격리조치를 했다면, 시쳇말로 '빨리 떨어버렸으면' 통계상 세계에서 5번째로 많은 코로나 감염국이 되진 않았을 것이다.

아베 총리의 우왕좌왕은 여전하다. 전국 초·중·고교 일제 휴교령도 그랬다. 이제는 매뉴얼을 이탈한 '즉흥주의'다. 갑작스러운 휴교령에 일하는 학부모들은 초비상이다. 학부모들은 "코로나19가 발병하지 않은 지역조차 왜 휴교령을 내리는지 제대로 설명하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런 비판 속에 아베 총리가 다시 한번 '매뉴얼 붕괴 상태'에서 즉흥적 의사결정을 했다. 한·중 양국에 대한 사실상의 입국 거부다.
당장 한국의 친지들을 방문했다가 발이 묶인 경우가 수두룩하고, 기업들의 일본출장도 올스톱됐다. 일본을 찾는 한국인만 연간 500만명.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에 대한 배려는 일절 없었다. 매뉴얼 붕괴 속에서 이어진 아베 내각의 즉흥주의가 어디로 가게 될까 주목된다.

ehcho@fnnews.com 조은효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