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정유진 기자 = "빛날 찬에 열매 실, 빛나는 열매라는 뜻의 이름이에요. 꿈꿔온 것이 좌절된 상태의 인물에게 결실을 맺어주고 싶었어요. 그러니까, 관객분들이 이 영화를 봐주시면 찬실이가 정말 찬실이가 되는거죠!"
지난 5일 개봉한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감독 김초희) 속 찬실이만큼이나 유쾌하고 발랄한 김초희 감독이 주인공 이름의 의미를 설명했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영화 프로듀서였던 찬실이 갑작스럽게 일을 잃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 영화다. 40대의 영화 프로듀서라는 주인공의 직업 설정부터 실제 영화 프로듀서 출신인 김초희 감독의 자전적인 영화라는 느낌을 준다.
◇ 김초희 프로듀서, 직장을 관두다
"(프로듀서) 일을 4년 전 쯤에 그만뒀어요. 7년 반 정도, 오랫동안 한 일이었어요. 그만두고 나서 심각하게 고민했어요. 영화를 그만둘까? 다른 걸 한다면 어떤 것을 할까? 그만 두는 방향으로 고민을 하면서 아예 완전히 다른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때가 마흔한살이었어요."
영화 속 찬실(강말금 분)은 함께 일하던 감독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후 일을 잃고, 거처까지 옮겨야 하는 상황 속에서 절친한 배우 소피(윤승아 분)의 집에서 가사 도우미 아르바이트를 한다. 김초희 감독 역시 영화 일을 그만두고 이것저것 직업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평소 가깝게 지내 온 윤여정 선생님이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 촬영에 들어가시면서 사투리를 배우셔야 했어요. '반찬을 파니 어쩌니 하는 것 보다는 사투리를 가르치는 게 낫지 않겠냐'고 하시더라고요. 한푼이라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일단 사투리를 가르치러 현장에 나갔죠. 그리고 알았어요. 역시나 난 여기 있어야겠구나. 다시 영화가 너무 하고 싶구나."
그렇게 '그것만이 내 세상' 현장에서 영화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깨닫게 된 때쯤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시나리오 초고도 완성됐다.
"누구에게 보여줘야겠다,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시급하게 나를 위해 쓰는 글 같은 거였어요. 이게 어쩌면 영화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1년간 열심히 고쳤죠. 고치고 고치고 또 고치고…이 시나리오는 각기 다른 버전의 5개 시나리오가 있어요. 이 버전에서 저 버전으로 다니다가 지금 이 시나리오는 예산에 맞춰 고친 마지막 시나리에요. 제가 PD 출신이라 큰 도움을 받았죠. 예산에 딱 맞춰 '저스트' 하게 찍었다고 할까?(웃음)"
◇ '찬실이'의 사람들, 김초희의 사람들
찬실이에게는 주인집 할머니(윤여정 분)와 소피, 영(배유람 분) 그리고 장국영(김영민 분)이 있다. 외롭고 혼자인 듯 보이는 찬실이지만, 할머니와 소피, 영과 장국영의 따뜻한 우정을 통해 성장하고 변화한다. 김초희 감독은 자신에게도 그런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고 했다. '(김 감독이)재능있는 사람이라 아쉽고 아까워서 주변인들이 그랬을 것'이라고 칭찬하니 특유의 부산 사투리로 "기자님, 속 얘기는 들어봐야 합니다, 뒤에 가서 몰래 물어봐야 합니다"라는, 유쾌한 답이 돌아왔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 김영민이 연기한 장국영은 가장 독특한 캐릭터다. 영화 '아비정전' 속 장국영의 모습을 본 딴 이 캐릭터는 꿈을 버리려고 하는 찬실에게 계속해서 영화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불어넣어주는 판타지적인 인물이다. 김초희 감독은 영화를 처음 하겠다고 결심한 스물세살 무렵의 초심을 떠올리며 이 캐릭터를 만들었다고 했다.
"전 홍콩 영화를 보면서 열광하던 세대에요. 소위 '시네필'이 되면서 홍콩 영화가 삶의 치열한 고민거리를 던져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너무 멀리 했죠. 그렇지만 솔직하게 제 마음을 들여다 보니 저는 홍콩 영화를 좋아했고, 거기 가장 첫 줄에 장국영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냈어요."
김초희 감독은 김영민을 "운명의 배우"라고 했다. 장국영의 배역을 놓고 고민할 때 MBC '라디오스타'를 본 프로듀서가 중화권 배우를 닮은 김영민을 추천했다. 소속사를 통해 시나리오를 전달했고, 2주 만에 흔쾌히 '하겠다'는 답을 받았다.
"일면식도 없는데 이 힘든 독립영화 해주신다고 해서 감사했어요. 본인도 사실 너무 특이한 캐릭터라서 하고 싶었다 하시더라고요. 이상하게 보면 한도 끝도 없었을텐데...대사에 보면 '장국영입니다'라고 인사를 하면 찬실이가 '하나도 안 닮았는데'라고 말하는 게 있어요. 김영민씨는 그 대사에 용기를 얻었대요. 자기는 안 닮았는데 그 대사가 없었으면 출연 안 했을 거라고요.(웃음)"
찬실 역을 200% 소화해낸 강말금에 대한 칭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다 30세에 연극을 통해 데뷔한 강말금의 여정은 역시 조금 늦게 자신의 꿈을 찾은 김초희 감독의 삶과 묘하게 겹친다. '늦깎이'지만 개성과 심지로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해가는 이들은 과연 과거보다 미래를 더 기대하게 하는 이들이다.
김초희 감독이 강말금을 알게 된 계기는 정동진독립영화제에서 본 김도영 감독의 단편 영화 '자유연기'였다.
"강말금의 얼굴에서 진정성을 봤어요. 어떤 진정성이냐면 열심히 인생을 살아온 사람만 갖는 얼굴이 있어요. 이건 저의 직관이에요. 저는 그의 얼굴에 진짜 그렇게 산 흔적이 있다고 봤어요. '이건 연기가 아니다, 저 안의 내면이 진짜다' 하는 확신이었죠. 서울에 올라가서도 이 사람이 안 잊히면 연락해 '찬실이' 역할을 기꺼이 제안하겠다 생각했어요. 물론 조금 더 알려진 배우를 섭외할 수 있었고, 가능성도 있었어요. 하지만 찬실이 만큼은 알려지지 않은 얼굴이어야 그것이 더 진정성을 가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 방황하던 청춘, 감독의 꿈을 되찾기까지
"저는 어릴 때 방황을 많이 했어요. 청소년기 질풍노도의 시기를 심하게 겪었죠. 아버지가 나전칠기를 하는 분이었는데 제가 자라던 시절에는 나전칠기가 사양산업이어서 집이 어려워졌어요. 그럼에도 우리 아버지는 그 일을 고집하셨고요. 평생 한가지 일만 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식구들 고생을 많이 시켰어요.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저희 집만의 가정사가 있어 방황을 많이 했어요."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방황하던 김초희 감독에게 꿈을 준 것이 영화였다. 6년 반 동안 비디오 가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영화를 좋아하게 됐다. 김초희 감독은 "영화를 좋아하게 된 순간부터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다"며 그때부터 영화에 대한 '순정'을 갖게 됐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그가 선택한 영화 관련 첫 직업은 애초의 꿈인 감독이 아니라 제작 프로듀서였다.
"저보다 영화를 잘 만드는 감독과 스태프가 있으면 기꺼이 그들을 도와서 영화 한 편을 완성시키는 게 굉장히 큰 의미가 있어요. 무수한 스태프가 이런 마음으로 영화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저 역시 그런 스태프였죠. 물론 프로듀서 일을 그만두게 되면서 결국엔 제가 감독이 되고 싶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 전에는 용기가 부족했어요. 좋은 영화가 아니면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완벽하지는 않아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만들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이 무엇인지 깨닫고 난 후, 좋지 않았던 아버지와의 관계도 좋아졌다고 했다.
"41세가 되기까지 저는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았던 사람이에요. 아버지가 일반적인 아버지와 달랐고 식구들을 고생시켜 원망이 많았죠. 그런 아버지의 눈에도 일을 그만두고 실직한 딸이 안돼 보였나봐요. 속을 못 드러내는 무뚝뚝한 경상도 분인데, 어느 날 저에게 장장 5장의 손편지를 써서 특송으로 보내셨어요. 그 편지를 받고 많이 울었어요. 우리 아버지는 보통의 아버지와 다르게 자기가 원하는 걸 평생 했기 때문에 제가 원하는 게 꺾이고 좌절됐을 때 어떤 심정이라는 것에 대한 이해가 있으셨던 거예요."
아버지와 화해하고 난 후, 아버지에 대한 평가도 달라졌고 삶을 바라보는 시각 역시 달라졌다. 김초희 감독은 성과가 있어야만 꿈이 이뤄진다는 생각에서 벗어났다고 했다. 성과가 없어도 한 개인의 삶 속에 무엇인가를 향한 치열한 태도가 있다는 점이 숭고하고, 그것을 존중해줄만 하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사는 게 사실은 힘들지만 행복한 것이고, 인간은 그렇게 살아야 할 이유와 권리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성과사회에 물들지 않고 용감하게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 저는 아버지가 하는 일에 대해 존중이 없었고, 무능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어요. 아버지가 뭐라도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시는 게 소원이었죠. 성과없이 예술을 하는 게 참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아버지와 비슷한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제는 알아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에 얼마나 용기가 필요한지, 또 그게 얼마나 고단한 삶인지. 무수한 실패와 소수의 성공, 어쩌면 영영 성공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할 수밖에 없는 거죠."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이처럼 김초희 감독이 첫 장편 영화를 선보이기까지 인생에 대해 깨달았던 바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는 영화가 많은 자본이 들어가고 여러 사람이 함께 만드는 것인만큼 소통하고자 하되 꼭 지키고 표현하고 싶은 것들을 만들겠다는 의지, 순정을 잃지 않으면서 하나하나 영화를 만들어가는 것이 소망이라고 했다. 더불어 인간으로서는 더 나은 인간이 되어가는 것이 목표다.
"인간은 나약해서 조금만 편해지거나 원하는 걸 가지게 되면 또 오만해지고, 나태해지고 실수하고, 그러다 또 절박하고 힘든 시기에는 그렇게 세상 겸손해지고 그렇죠. (웃음) 반성해도 잘 안 되고, 남들에게 상처주고 싶지 앟은데 성질을 못 이겨 상처주고 말아요. 저도 그리 좋은 인간이 아니라 남들처럼 실수하고 살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인간이 됐으면 좋겠어요. 더 나은 인간이 됐다는 기쁨은 성장의 기쁨이에요. 고통이 있어야 성장하고, 성장의 기쁨은 지속적이라 여기에 행복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고 보면 결국 행복과 불행은 사실 맞물려 있는 것 같아요. 아이러니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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