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 칼럼] 성실함이 전염병을 이긴다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03.09 18:01

수정 2020.03.09 18:01

'페스트' 작가 카뮈의 통찰력
성실성은 직분을 다하는 것
시민보건대의 활약상 그려
[곽인찬 칼럼] 성실함이 전염병을 이긴다
요즘 사람 도리를 못하고 산다. 지난주 잘 아는 형이 서울에서 딸 혼사를 치렀다. 고민 끝에 불참하고, 축의금만 보냈다. 하필이면 사위가 경상북도 출신이란다. 솔직히 그래서 더 주눅이 들었음을 고백한다. 나중에 들으니 사위쪽 친인척은 부모님을 포함해 모두 4명만 참석했다고 한다.
당초 친지용으로 대절한 버스는 취소했다.

내가 아는 형은 자기보다 항렬이 높은 어른은 식장에 오지 못하게 했다. 자기도 힘들었을 텐데 사돈댁 기념사진을 더 걱정한다. 저쪽은 일가친척 사진이 얼마나 휑할까 하면서. 세상에, 어쩌다 결혼식이 이렇게 됐나. 주인공들은 허니문도 못 갔다. 당사자는 물론 양가 부모님 속이 얼마나 새까맣게 탔을까. 그래서 더 미안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코로나19가 우리 삶을 뒤틀고 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알베르 카뮈는 '페스트'(1947년)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소설은 알제리 제2도시 오랑이 배경이다. 카뮈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오래 결핵을 앓았다. 공기로 옮는 대표적인 질병이다. 전염병을 소재로 소설을 쓰기엔 적임자다.

줄거리는 이렇다. 어느 해 4월 항구도시 오랑에 흑사병이 돈다. 죽은 쥐가 곳곳에 나뒹굴고 고양이가 사라진다. 도시 전체가 봉쇄된다. 그 안엔 흑사병과 싸우는 사람, 도시에서 도망치려는 사람, 흑사병을 즐기는 사람 등 별별 사람이 다 나온다. 의사 리외는 죽을 힘을 다해 환자를 치료하고, 타루는 시민 보건대를 조직한다.

이걸 영웅주의라고 냉소하는 이가 있었다. 타지에서 온 신문기자 랑베르다. 리외가 말한다. "비웃을지 모르지만,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성실성이 뭔가? "성실성은 내 직분을 완수하는 거예요." 리외는 의사의 직분을 다했다. 페스트를 한방에 물리칠 영웅도 특효약도 없었다. 리외는 결국 가장 가까운 동료 타루와 아내마저 잃는다.

열달 동안 페스트가 오랑을 지배했다. 유배와 이별의 감정이 사람들을 짓눌렀다. '무쇠빛' 시신은 제대로 된 장례절차조차 밟지 못했다. 관은 소독약을 뿌려 재활용했다. 미래는 사라지고 오직 현재만이 존재했다. "사랑에는 어느정도 미래가 요구되는데, 우리에게는 순간들만 남았다." 이듬해 2월 페스트가 물러갔다. 도시는 다시 문을 열었다. 지긋지긋하던 페스트는 제 풀에 꺾였다.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갔는지도 모른다.

대구와 경북이 코로나19 사태로 힘겹다. 지역이 통째로 격리된 것은 아니지만, 대구 사는 부모와 서울 사는 딸이 만나기가 쉽지 않다. 자가격리 대상이 아닌데도 부모는 대구로 내려오지 말라고 손사래를 친다. 결혼식은 엄두를 못내고, 미루지 못하는 장례식은 빈소가 텅 비었다. 자칫 한국 전체가 유배와 이별의 감정에 휩싸일 판이다. 세계 어딜 가나 한국인은 기피인물이 됐다. 일찍이 이런 일은 경험한 적이 없다.

그렇다고 지금 누굴 탓하진 말자. 권영진 대구시장은 "사회적 거리는 두어도 심리적 거리는 줄이자"고 시민들에게 말했다. 권 시장의 호소는 우리 모두를 향한 외침이다. 페스트이든 코로나19이든 전염병과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인내와 성실성이다. 기적은 없다. 국가는 국가대로, 나는 나대로 직분을 다하면 된다. 카뮈는 말한다.
"사람을 살리고 이별을 경험하지 않게 하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페스트와 싸우는 것이다.
" 대한민국, 특히 대구·경북의 분투를 응원한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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