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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클릭]긴급재난융자와 성과평가(KPI)

이환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04.07 13:59

수정 2020.04.07 16:56

[파이낸셜뉴스]
[현장클릭]긴급재난융자와 성과평가(KPI)


우리나라의 고속철도 정시운행률은 99.8%다. 사실상 자연재해나 천재지변이 없는 한 제때 철도가 온다고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정시운행률'에는 함정이 있다. 열차가 도착역에 20분 이상 지각하지 않으면 정시운행이 되기 때문이다. 정시운행률은 직원들의 성과평가(KPI)에 반영되고, 승진과 월급 등에도 영향을 준다. 가방에 컵라면을 넣고 다닌던 한 비정규직 청년의 죽음, 지난해 밀양역 열차 사망 사고 등도 어쩌면 KPI를 위한 20분의 한도가 원인 중 하나일 지도 모른다.
손병석 한국철도 사장은 지난해 11월 기자들과 만나 "지연운행 관련 기관평가 가산점 등을 안전에 더 초점을 맞출 수 있도록 바로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정부가 100조원의 '긴급자금'투입을 결정했지만 이 긴급자금도 KPI에 발목이 잡히는 모양새다.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기업은행, 신용보증기금, 기술보증기금, 한국주택금융공사 등이 가입돼 있는 국책금융기관 노동조합 협의회(국노협)는 대정부 호소문을 통해 "국책금융기관 내부 경영평가를 중단하라"고 말했다. 국노협은 "기업은행의 경우 대출 폭증으로 일이 몇배는 늘어났는데 은행 측이 기존 이익 목표를 버리지 않고 직원을 압박한다"며 "위기극복에 집중하고자 한다면 기존 방식의 경영평가를 중단하거나 코로나19 대응 사업으로 지표를 변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책 금융기관 일선 창구 직원에게는 2주째 매출이 줄어 직원 월급도 주지 못하게 생긴 작은 업체 사장님, 담보도 없고 기존에 미상환된 대출도 있는 영세 자영업자에게 추가 대출을 해주기 어려울 수 있다. 대출 ‘가이드라인’에 적혀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 직원에게는 대출을 받으러 온 딱한 사정의 고객보다 생계를 지켜야할 가족이 더 ‘긴급’하다. 향후 대출이나 보증 등이 부실화될 경우 그 책임을 온전히 져야 한다고 생각하면 이럴 때 일수록 더 보수적이고 신중하게 해당 업무를 수행해 나갈 것이다.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은 지난주 파이낸셜뉴스와 인터뷰를 하며 "고용유지지원금을 신청하는 사업체 수가 3개월 만에 지난해의 20배 이상 증가했다"며 "신청 서류 및 절차를 간소화하고 자금이 제때 지급될 수 있도록 감사관실 상담을 바탕으로 '면책 제도'를 적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신청 자격이 되지 않는 사람이 실업급여를 타거나, 고용유지지원금을 타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며 비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전무후무한 위기 상황에서는 긴급한 사람의 지원이 얌체 같은 체리피커의 처벌보다 우선해야 하지 않을까.

과거 국정감사 시즌 어떤 공공기관의 한 직원이 말했다.
기관장이 직원들에게 항상 '맡은 일을 열심히 하고, 혹시 문제가 생기면 책임은 내가 질 것'이라고 말해와서 큰 걱정은 되지 않는다고. 기관장의 책임 있는 말은 조직원의 사기와 업무에도 영향을 미친다. 하물며 코로나19와 같은 위기 상황에 눈앞의 수익성을 걱정하는 곳과, 면책을 약속하는 기관의 분위기가 같을 리 없다.
국노협은 "어려워 찾아온 이들에게 금융상품을 끼워 팔라는 은행을 어찌 믿고 따르겠습니까"라고 묻는다.

hwlee@fnnews.com 이환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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