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전국

[5·18 40주년을 말하다] ② 7공수여단과 첫 충돌

뉴스1

입력 2020.05.01 08:30

수정 2020.05.01 08:30

80년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이었던 박관현 열사 © News1
80년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이었던 박관현 열사 © News1


[편집자주]1980년 5월 한반도 서남권의 중심도시인 광주에서는 한국 현대사 중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이다. 5·18 40주년을 맞아 5·18기념재단이 발간한 '5·18 열흘 간의 항쟁' 등의 자료 등을 토대로 40년 전 비극의 원인과 진행과정, 남은 과제는 무엇인지 되짚어본다.

(광주=뉴스1) 박준배 기자 = 1980년 5월17일 오후 9시40분, 중앙청에서 갑작스레 임시 국무회의가 열렸다.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의결하는 자리였다.

회의장 주변엔 군인 595명이 무장한 채 삼엄하게 도열했다.

전두환과 협의를 마친 노태우 수도경비사령관이 중앙당 외곽에 배치한 병력이었다.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국무회의는 찬성이나 반대 토론 없이 불과 8분 만에 '비상계엄 전국 확대'가 의결됐다.

비상계엄 전국 확대 의결과 동시에 신군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등 전국 대도시에 서둘러 군대를 투입했다. 특히 서울과 광주가 신군부의 주요 공격 목표지였다.

서울에는 1·3·5·9·11·13공수여단이, 광주는 7공수여단 33대대와 35대대가 전남대와 조선대에 각각 배치됐다.

이들은 수개월 간 '시위 진압 훈련'에만 몰두해 온 신군부의 정예부대였다. 시위 진압을 위한 전투장비로 완전무장한 채 투입됐다.

18일 새벽 1시,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계엄포고령 제10호'를 발령했다.

주요내용은 모든 정치 활동 중지, 대학 휴교, 옥내·외 집회, 시위와 전·현직 국가원수 비방 금지, 직장 이탈과 파업 불허, 언론 사전 검열 등이었다.

비상계엄 전국확대 의결 직후 밤 10시부터 전국적으로 일제히 예비 검속을 시작했다. 다음날 새벽까지 모두 2700여명을 강제 연행했다.

사전에 '국기 문란자 수사계획'과 '권력형 부정 축재자 수사 계획' 등 2개의 보고서를 작성해 예비 검속 대상자를 미리 분류해둔 상태였다.

광주에서도 사회운동, 학생운동 지도자들이 상당수 검거됐다.

보안사가 작성한 '광주사태 합동수사' 자료를 보면 당시 광주의 검거 대상자는 전남대 12명, 조선대 10명 등 총 22명이었다.

전남대는 박관현, 윤한봉, 정동년, 박선정, 윤목현, 한상석, 박진, 윤강옥, 문덕희, 하태수, 박형선, 김상윤 등이 대상이었다.

조선대는 박종민, 김운기, 이경, 유소영, 송찬석, 이강래, 유재도, 이권섭, 양희승, 구교성 등이 검거 명단에 포함됐다.

5·17 계엄이 확대되자 전남대 총학생회 지도부는 밤새 상황을 계속 점검하면서 서로 연락을 시도했다.

하지만 학생지도부의 상당수가 이미 검거됐고, 나머지 지도부와는 연락도 두절된 상태였다. 남은 지도부는 일단 몸을 피해야 했다. 박관현 총학생회장도 피신했다.

그 결과 5·18민주화운동의 최초 도화선이 된 전남대 정문 앞 시위는 총학생회 지도부가 아닌 일반 학생들에 의해 시작됐다.

도서관에 공부하러 나왔다가 계엄군에 의해 제지당한 일반 학생들이나 '휴교령이 내리면 다음 날 10시 교문 앞에서 모이자'고 했던 약속을 기억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나온 학생들이 학교 앞에 모였다.

당시 전남대 정문 앞에는 완전무장한 7공수여단 33대대 병력 일부가 교문을 통제하고 있었다.

이들은 휴교령이 내려졌다며 학생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쉽게 돌아서지 않았고, 오전 10시가 지나자 학교에 들어가려고 모여든 100여명의 학생들이 정문 앞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숫자가 200~300명으로 불어나자 노래와 구호가 나왔다.

그때 공수대원들이 함성을 지르며 돌격, 진압을 개시했다. 진압봉으로 닥치는 대로 가차없이 폭행했고 10여명의 학생들이 부상당했다.

부상당한 학생들을 남긴 채 쫓길 수밖에 없었지만 학생들은 마냥 도망가지는 않았다. 밀리는 와중에도 서로 연락을 취해 광주역 광장에 재집결했다.

광주역 광장에는 300~400여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이들은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을 지나 금남로 전남도청 앞 가톨릭센터 앞까지 진출했다.

학생들은 '비상계엄 해제하라' '김대중을 석방하라' '휴교령을 철회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계엄군은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그러나 이들 초기 시위대는 아직 소수였고, 전투경찰의 진압조차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고 쫓겨다닐 정도였다. (3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