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이구순의 느린걸음

[이구순의 느린걸음] 블록체인 기업들, 아옹다옹할 겨를이 없다

이구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05.26 17:22

수정 2020.05.26 17:22

[이구순의 느린걸음] 블록체인 기업들, 아옹다옹할 겨를이 없다
블록체인·가상자산 시장에 '큰 놈'들이 몰려온다.

JP모간이 가상자산 거래소를 고객으로 받기 시작했다. 나스닥은 블록체인 솔루션업체 R3와 손잡고 금융기관을 대상으로 가상자산을 발행하고 거래할 수 있도록 서비스를 내놓겠단다. 골드만삭스도 곧 가상자산에 대한 공식 입장을 내놓겠다고 한다. 비자카드도 가상자산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고 공개로 선언했다. 삼성전자는 블록체인을 중장기 사업으로 편입해 본격적으로 투자하기로 했고, 일찌감치 블록체인 서비스에 공을 들인 SK텔레콤은 열매를 눈앞에 두고 있다.
LG CNS도 본격 서비스를 쏟아내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페이스북, 스타벅스는 이미 사업을 키우고 있다.

최근 국내 가상자산 시장에 작은 잡음이 일었다. 가상자산 거래소 지닥이 카카오의 블록체인 자회사 그라운드X가 발행한 가상자산 '클레이'를 상장하면서 정작 그라운드X와 사전 논의하지 않은 것을 둘러싼 시시비비였다. 양쪽은 퍼블릭 블록체인의 원리, 상도의 같은 명분을 들이대 SNS에서 설전을 벌이더니 결국은 협력관계를 끊고 냉랭한 상태로 몇 주를 보내고 있다.

객꾼 입장에서 한마디 하자면 양쪽 다 잘한 것 없다. 깊은 내막까지야 일일이 따지기 어렵지만, 상호 협의하지 않은 채 장터 같은 SNS에서 말다툼을 한 것이 민망했다. 언론까지 내편 네편 갈라 줄 세우는 듯 보여 언론계 한 사람으로 언짢았다. 무엇보다 블록체인의 핵심을 뒷전으로 돌려놓은 것 같아 안타까웠다.

지난일 다시 들먹여 괜한 구설 만드는 것 아닌가 걱정도 되지만,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겠다 싶어 얘기를 꺼냈다.

블록체인 기술의 핵심은 '합의'다. 중앙의 통제자가 결정한 규칙이 아니라 커뮤니티의 합의로 기준을 만들고 운영하는 게 블록체인의 기본이다. 토론을 통해 기준과 합의점을 스스로 세운다.

그런데 최근 블록체인·가상자산 업계에서 합의를 위한 토론이 아니라 아옹다옹 다투는 사례를 종종 본다. 토론 끝에 기준을 만들기는커녕 파국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참여자들이 동의하는 기준을 스스로 세우려는 노력은 국내 블록체인 업계에서 아직 못 찾았다.

글로벌 대기업들이 시장에 몰려오고 있다. 자금력, 인력, 정보력이 막강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보다 더 막강한 것은 수십년 사업을 운용하면서 만들어놓은 그들만의 기준이다. 대기업들은 블록체인 시장에도 자신들이 익숙한 그 기준을 들이대고 싶어할 것이다.

그때 블록체인 업계도 스스로 토론을 통해 만들어 놓은 기준을 떡하니 내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블록체인 영역에는 자체적 기준이 있으니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내놓을 기준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시장 생기기 전부터 깃발 꽂고 고생한 선발주자들의 특권이자 의무 아니겠나.

블록체인 기업들이 자기들끼리 아옹다옹하는 사이 이미 글로벌 기업들은 블록체인 영역에 깊숙이 들어와 영토를 넓히고 있다.
지금이라도 블록체인 업계가 머리 맞대고 토론했으면 한다. 기술과 산업을 가장 잘 아는 사람으로서 고유한 기준을 합의해줬으면 한다.
괜한 말싸움 말고 생산적인 토론을 했으면 한다.

cafe9@fnnews.com 이구순 블록체인부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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