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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25년전 예언된 '홍콩의 죽음'

윤재준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06.12 15:32

수정 2020.06.12 16:05

/사진=뉴스1
/사진=뉴스1

홍콩의 주권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되기 2년전인 지난 1995년 경제전문지 포천은 “홍콩의 죽음”이라는 제목의 커버스토리를 실었다. 당시 반환 날짜가 점차 다가오면서 외신들은 영국령 홍콩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홍콩의 주권이 공산국가인 중국으로 넘어간다는 것에 중점을 두고 기사들을 쏟아냈었다. 포천의 기사 제목은 자본주의가 활개를 치면서 자유를 누려온 홍콩이 중국으로 넘어가는 것을 바라보는 불안한 시선을 잘 보여줬다.

반환 초기의 홍콩은 비교적 평온했다. 식민지 시절의 공공기관 휘장과 게양 국기가 교체된 것 외에는 반환 4개월 뒤에 직접 방문했을때 이전의 홍콩과 별다른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빅토리아 여왕과 조지 6세의 동상도 공원에 그대로 남았고 중국군이 주인이 된 옛 영국군 사령부의 간판도 교체되지 않은 상태였다.


중국으로의 반환 23년이 지난 지금 2047년까지 보장됐던 홍콩인들에 의한 자치는 갈수록 큰 위협을 받고 있다.

지난해 6월 캐리 람 홍콩행정장관이 범죄인 인도법안(송환법)을 도입하려하자 시민 100만여명이 거리로 나오면서 민주화 운동이 촉발됐다. 홍콩 경찰은 최루탄과 공기총, 물대포를 동원해 강경 진압을 하면서 이미지를 구겼고 한 전철역에서 폭력배들이 시민들을 무차별 구타하는데도 늑장 출동해 결탁 의혹이 제기됐다.

/사진=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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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발적으로 발생하던 시위는 최근 들어 경찰의 대대적인 시민 검거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우려로 많이 수그러든 상태다. 중국 정부의 꼭두각시나 마찬가지인 홍콩 정부는 지난 4월 코로나19를 틈타 지난해 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민주당을 창당한 마틴 리와 반중국 성향의 매체 넥스트 미디어 창업자 지미 라이 등 민주 인사 14명을 기습 구속했다. 송환법 반대 행진이 시작된 지난해 6월9일부터 올해 5월29일까지 8981명이 구속됐다.

송환법은 철회됐지만 이번에는 중국 정부가 외세개입과 테러방지, 사회안정을 빙자한 국가안보법을 홍콩 입법회를 거치지 않고 직접 도입하기로 하면서 홍콩의 자치가 다시 위기를 맞고 있다.

기업과 학계, 문화예술계를 포함해 각계에서는 중국 눈치를 보느라 잇따라 국가보안법 지지 성명를 내고 있다. 홍콩을 대표하는 기업인인 리카싱 청쿵실업 창업자와 홍콩 전력의 75%를 제공하는 CLP홀딩스의 마이클 카두리 회장이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홍콩의 8개 공립대 총장들과 문화연예계 인사 수백명도 지지 성명을 공개했는데 명단에는 사망한 배우 장국영과 매염방 이름까지 포함돼 조롱거리가 됐다.

영국인들이 세운 홍콩기업인 스와이어와 자딘매티슨 뿐만 아니라 영국계 은행인 HSBC와 스탠다드차타드(SC)까지도 중국의 눈치를 보며 결국 지지 성명을 냈다.

렁춘잉 전 홍콩 행정장관은 HSBC가 국가보안법에 계속 침묵을 지키자 페이스북을 통해 입장을 빨리 결정하라고 경고하면서 대체할 중국계나 외국은행들은 얼마든지 많다고 압박했다. 결국 피터 웡 HSBC 아시아·태평양 최고경영자(CEO)는 홍콩 시내에서 친중 인사들이 보는 앞에서 지지한다고 서명한 것으로 보도됐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홍콩의 혼란은 캐리 람 행정장관의 미흡한 대처 책임이 크다.

람 장관은 홍콩에서 출생해 명문학교들을 거쳐 시민들이 낸 세금으로 영국 캠브리지대학교를 재학한 ‘국비유학생’이었다. 영국 식민지 정부에서 공무원으로 재직해 자유를 누리며 출세했던 그가 행정장관으로써 홍콩인들의 자유를 위해 중국 정부에 바른 말을 하기는 커녕 중국 공산당과 소수의 친중 홍콩 인사들을 위한 꼭두각시가 됐다.

/사진=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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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송환법 반대 시위가 한창일대 민주 진영과 진지한 대화 시도는 하지도 않았고 3개월뒤에야 결국 철회했지만 홍콩 경찰의 잦은 폭력 진압에 민심은 등을 돌렸다. 이러는 사이 홍콩의 관광과 유통업이 큰 타격을 입었으며 설상가상으로 올해들어 코로나19가 세계를 덮쳤다.

외신들에 따르면 국가안보법 도입에 따른 불안과 미국의 홍콩 특별지위 박탈 가능성에 많은 다국적 기업들이 홍콩을 떠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최근 헤지펀드들은 ‘홍콩은 죽었다’는 표현까지 쓰면서 홍콩 철수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됐다.


월봉으로 41만홍콩달러(약 6400만원)나 받는 람 행정장관의 무능한 대처에 홍콩은 25년전 포천지의 제목처럼 이미 죽었는지도 모른다.

jjyoon@fnnews.com 윤재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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