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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인찬 칼럼] 기본소득 아직 때가 아니다

복지국가 핀란드도 실패
경제학 족보에도 없는데
서둘다 제2 소주성 될라
[곽인찬 칼럼] 기본소득 아직 때가 아니다
유하 시필레(59)는 핀란드의 백만장자 사업가다. 그는 1996년에 솔리트라(Solitra)라는 통신장비업체를 미국 회사에 팔았다. 그해 시필레는 핀란드 소득 1위에 올랐다. 그는 중도당 대표로 2015년 총선에서 좌파 사회민주당을 꺾고 총리가 됐다. 총리로 취임할 때 핀란드 경제는 영 좋지 않았다. 유럽 전체가 미국발 금융위기와 뒤이은 남유럽 재정위기로 비틀거렸다. 그 와중에 핀란드 경제의 기둥이나 다름없던 노키아마저 쇠락했다. 모바일 부문을 마이크로소프트(MS)에 팔아치운 노키아는 통신장비 사업으로 간신히 명맥만 유지했다. 자연 정보기술(IT) 산업 쪽에서 실업자가 쏟아져나왔다.

핀란드는 복지 선진국이다. 고용안전망도 튼실하다. 굳이 새 일자리를 찾지 않아도 한동안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다. 핀란드 실업자들은 이른바 인센티브 함정에 빠졌다. 새 일자리가 나와도 번듯한 자리가 아니면 외면했다. 창업도 주저했다. 차라리 실업수당 받는 쪽을 택했다. 사업가 출신인 시필레 총리의 눈에 이런 현상이 곱게 보였을 리가 없다.

그래서 시도한 게 바로 기본소득 실험이다. 장기 실업자 2000명을 임의로 뽑아 매달 560유로(약 76만원)를 주었다. 560유로는 실업수당과 비슷한 금액이다. 원래 수당을 받으려면 구직 노력이 필수다. 그래서 직업교육도 받는 척했다. 그러나 기본소득 실험에선 실직자가 새 직장을 구하든 말든, 빈둥빈둥 놀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렇게 2년(2017년 1월~2018년 12월)을 지켜봤다.

결과는 실망스럽다. 제일 바란 게 구직효과인데, 기본소득을 받지 않는 그룹과 별 차이가 없었다. 일자리는 늘지 않았고,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집권 중도당은 지난해 총선에서 4위로 밀렸다. 정권은 사민당으로 넘어갔다.

핀란드 여론도 기본소득을 탐탁잖게 여겼다. 비즈니스 싱크탱크인 EVA가 2018년 가을에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면 60%가 기본소득에 반대했다. 이들은 복지 혜택이 꼭 필요한 사람한테 먼저 가야 한다고 말했다. 73%는 실업 보조금을 받으려면 응당 구직 노력을 펼쳐야 한다고 답했다.

핀란드 실험이 남긴 교훈 1호는 함부로 덤비지 말라는 것이다. 헬싱키 대학의 헤이키 힐라모 교수는 "기본소득이 하위층의 자립 노력을 활성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핀란드 실험 결과는 뺨을 때린 격"이라고 말했다. 실험이 우파, 그것도 기업가 출신 총리의 주도 아래 이뤄졌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사실 핀란드 사민당과 노조는 보편적 복지인 기본소득에 반대했다. 한국에서 보수 미래통합당이 기본소득 아이디어를 띄우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핀란드 복지는 세계가 알아준다. 2018년 세금과 사회보험료를 합친 국민부담률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43%에 이른다. 우린 28% 수준이다. 한국 같은 복지 후진국이 기본소득을 말하는 것은 마치 지진아가 월반을 조르는 격이다. 지금은 고용안전망 등 기초를 더 단단히 다질 때가 아닌가 싶다.

기본소득은 여태껏 실시한 나라도, 실험에 성공한 나라도 없다. 경제학 족보에도 없다. 공연히 우리가 '임상시험'을 자청할 이유가 없다.
소득주도성장이 반면교사다. 아무도 가지 않은 가시덤불 길을 헤쳐서 우리가 얻은 게 뭔가. 소주성은 폐기 일보 직전이다. 다른 거 다 떠나서 기본소득은 하고 싶어도 줄 돈이 없다. 용감무쌍하게 세금을 왕창 올리면 모를까.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