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대통령·대통령실

"오빠 간다, 부모님 잘 모셔라" 작별인사…70년 만에 돌아온 김일병

뉴스1

입력 2020.06.25 22:32

수정 2020.06.26 00:38

문재인 대통령이 25일 경기 성남 서울공항에서 열린 6.25전쟁 70주년 행사에 참석해 기념사를 하고 있다.(청와대 제공)2020.6.26/뉴스1
문재인 대통령이 25일 경기 성남 서울공항에서 열린 6.25전쟁 70주년 행사에 참석해 기념사를 하고 있다.(청와대 제공)2020.6.26/뉴스1


문재인 대통령이 25일 경기 성남 서울공항에서 열린 6.25전쟁 70주년 행사에서 국군 전사자들의 유해함에 참전기장을 수여한뒤 참석자들과 묵념하고 있다.(청와대 제공)2020.6.26/뉴스1
문재인 대통령이 25일 경기 성남 서울공항에서 열린 6.25전쟁 70주년 행사에서 국군 전사자들의 유해함에 참전기장을 수여한뒤 참석자들과 묵념하고 있다.(청와대 제공)2020.6.26/뉴스1


6·25전쟁 70주년을 맞은 25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6·25전쟁 참전자 묘역을 찾은 스님들이 기도를 하고 있다. 2020.6.25/뉴스1 © News1 이재명 기자
6·25전쟁 70주년을 맞은 25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6·25전쟁 참전자 묘역을 찾은 스님들이 기도를 하고 있다. 2020.6.25/뉴스1 © News1 이재명 기자

(서울=뉴스1) 구교운 기자 = "민자야, 오빠 간다. 엄마, 아버지 잘 모셔라."

여동생에게 인사를 남기고 6·25 전장으로 떠난 오빠 고(故) 김정용 일병은 70년 만에야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25일 오후 8시20분 경기 성남 서울공항 격납고에서 열린 6·25전쟁 제70주년 행사에서 국군 전사자 유해 147구와 유엔군의 유해가 봉환됐다.

청와대에 따르면 이들은 미국 '전쟁포로 및 유해발굴 감식국'(DPAA)에서 한·미 공동 감식작업으로 확인된 국군전사자들로, 이 가운데 북한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7명은 가족들의 DNA 시료 채취를 통해 신원이 확인됐다.

이들은 고 김정용·김동성·박진실·정재술·최재익·하진호 일병, 오대영 이등중사다.



김정용 일병은 부산 동구 출신으로 부산상고를 졸업한 뒤 대학 입시를 준비하다 1950년 8월 부산에서 징집돼 미군에 입대했다.

그는 잠시 집에 돌아왔다가 동생 민자씨에게 부모님 잘 모시라는 인사를 남기고 군에 복귀한 뒤 70년 간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그해 12월 전사했다.

김 일병의 실종 소식이 전해진 뒤 오빠로부터 "지금은 흥남부두에 앉아서 바다를 쳐다보고 있다.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민자 앞으로 편지를 쓴다"는 편지가 왔다. 이후 집에 불이 나는 바람에 김 일병의 사진과 유품이 모두 손실돼 원통했다고 한다.

김 일병의 어머니는 "아들이 죽었는디, 내가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냐"며 우산을 부러뜨리고 궂은 날씨에도 우산을 쓰지 않으며 슬픔 속에 지냈다고 한다.

미자씨는 "70년 만에 이게 웬일이냐. 오빠가 돌아오다니 내가 그렇게 찾으려고 했는데 이제 돌아왔다"며 통곡했다고 한다.

김동성 일병은 충북 영동군 용산면 출신으로 입대 전 농사일을 하다 입대했다. 이웃 동네에 살던 배우자와 결혼해 슬하에 아들 두명을 뒀다. 그는 1950년 9월 입대했고 전사일은 확인되지 않았다.

김 일병의 아들은 김 일병이 군으로 가는 트럭에 타고 갈 때 크게 손을 흔들어주던 모습과 아버지의 전사통보를 받은 어머니가 대성통곡을 하던 모습을 기억했다.

김 일병의 배우자는 재혼하지 않고 홀로 농사일을 하며 두 아들을 키웠다. 첫째 아들은 경찰이 됐고 둘째 아들은 산업은행에 다녔다.

김 일병의 아들은 "아버지가 북한 지역에서 전사하셨다는 이야기를 어머니를 통해 들어 알고 있었지만 아버지 유해를 모실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며 "어머니 유품으로 십자가가 있는데 아버지를 현충원에 모실 때 함께 모셨으면 한다"고 했다.

하진호 일병의 동생은 보이스피싱을 의심할 정도로 오빠의 신원 확인소식을 믿지 못했다.

하 일병은 1944년에 결혼해 슬하에 두 딸을 뒀다. 그는 1950년 8월 미군 부대에 입대했다. 하 일병은 이후 실종됐으나 유해는 찾지 못했고 그의 가족들은 1956년 전사처리 통보를 받았다.

하 일병의 배우자는 전사 사실을 끝까지 믿지 못하고 남편이 살아올 것이란 희망을 갖고 경주시장에서 잡화를 팔며 두딸을 키웠다고 한다.

하 일병의 동생은 "부모님이 오빠를 항상 그리워하시던 모습이 생각나 가슴 아프다"며 "유전자 채취를 한 노력의 결실로 오빠의 유해를 찾은 것 같아 너무 기쁘다. 국방부와 국가의 노력에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말했다.

부산 동구 출신의 최재익 일병은 어릴 때부터 글재주가 있고 똑똑해 25살때 통장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1950년 8월 입대했다. 최 일병의 부모님이 훈련소를 찾아가 면회를 하며 떡을 건네줄 때 최 일병은 "다음에는 오지 마라. 훈련이 끝나 내일이면 전방으로 간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1951년 5월 전사했다. 최 일병의 전사 이후 최 일병의 배우자는 부산 조선방직에 다니며 1남1녀를 키웠고 최 일병 어머니도 나물을 캐거나 풀빵을 팔며 생계를 이어갔다고 한다.

최 일병의 아들은 "밥을 먹을 때나 술을 먹을 때나 아버지 소식을 듣고 죽는 게 소원이라고 생각했는데 소원이 이뤄져 정말 감개무량하다"고 했다.

오대영 이등중사는 키가 크고 훤칠하며 덩치가 좋았다고 한다. 그는 형의 권유로 1950년 9월 입대했다 이듬해 1월 전사했다.

그의 하나뿐인 아들은 매우 어렸을 때 아버지가 휴가를 나왔던 기억이 전부라고 했다. 오 이등중사의 배우자는 전사통지를 받은 뒤 부상자들 속에 남편이 있을까 아들을 업고 남편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오 이등중사의 아들은 "아버지를 찾았다는 소식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벅찬 감격을 느낀다"며 "아버지의 그리움을 달랠 수 있도록 국가에서 국립묘지에 정성껏 안장해주시면 감사하겠다"고 말했다.

박진실 일병은 전남 해남 출신으로 부산에서 대학을 다니기 위해 부산 영도의 친척집에 머물던 중 1950년 8월 학도병으로 입대했다. 그의 나이 19살이었다.

박 일병의 입대 소식에 박 일병 가족들은 1960년쯤 부산으로 이사했으나 박 일병의 생사를 알 수 없었다. 박 일병의 어머니는 "3대 독자 외아들을 나라에 바쳤다. 제발 돌아오기만 했으면 좋겠다"며 매일 새벽 기도를 다녔다고 한다.

박 일병이 미군부대에 입대했다는 이야길 듣고서는 "미국 어디에 살고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안고 살다 1997년 작고했다.

박 일병의 동생은 "어머니를 모시고 살며 늘 오빠가 돌아오길 기다렸다"며 "유해를 찾았다는 소식을 듣고 말을 잇지 못했고 손발이 떨렸다"고 전했다.

정재술 일병의 동생은 남편과 자녀 둘을 낳았지만 사별하는 바람에 전쟁 전까지 부산에서 오빠와 함께 살았다.

정 일병이 징집된 뒤 정 일병 동생은 부산 집결지로 몇번 면회를 갔는데 어느 날 아침 부대 전체가 철수해 망연자실해 했다고 한다. 그 후 3개월이 지난 뒤 오빠의 전사통보를 받았다.

정 일병의 신원은 조카의 DNA로 확인됐다.
정 일병의 조카는 "어머니가 한평생 오빠를 그리워했다"며 "5년 전 어머니가 작고하셨는데 오빠의 유해봉환을 보지 못하시고 돌아가셔서 너무 안타깝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오빠를 찾으며 많이 우시던 모습이 선명하다"고 안타까워했다.


문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농사를 짓다 말고, 학기를 다 마치지도 못하고, 가족을 집에 남겨두고 떠난 우리의 이웃들이 낙동강 전선을 지키고 서울을 수복한 영웅이 됐다"며 "아직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못한 12만3000 전사자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는 그날까지 포기하지 않고 찾아낼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