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칼럼 fn광장

[fn논단] '조슈아 벨'은 당신 옆에도 있다

김충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07.01 18:03

수정 2020.07.01 18:03

[fn논단] '조슈아 벨'은 당신 옆에도 있다
워싱턴DC 지하철역,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야구모자를 눌러 쓴 청년이 낡은 바이올린으로 연주를 시작했다. 43분 연주하는 동안 현장을 오간 사람은 1097명, 그들은 단 1초도 연주를 듣는 척도 않고 지나쳤다. 단지 일곱 명의 청년이 1분 남짓 지켜보았다. 다음 날, 워싱턴포스트지는 기사를 실었다. 청년은 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 'Joshua Bell(조슈아 벨)'이며, 35억원짜리 스트라디바리우스로 연주를 했다고. 공연을 제안한 워싱턴포스트지는 일상에 쫓겨 자기 주변에 존재하는 소중한 것들을 못 보는 '현대인의 모습'을 꼬집으려 기획했다고 밝혔다.

기사를 읽던 날, PD 구보씨는 벌떡 일어나 동네 전철역으로 나갔다.
연주하는 청년은 없었다. 그날부터 구보씨는 주변 이곳저곳을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동네 빌딩 지하 1층에서 '조슈아 벨'을 마주쳤다. 100평 넓은 동굴! 구보씨는 보물섬을 발견한 심정이었다. 그곳을 가득 채운 물건들을 보는 순간 도둑질 충동이 솟았다. 유명한 소설집, 시집. 인문, 지리, 과학, 온갖 장르의 책들이 곳곳에 즐비했다. 그런데 지키는 직원이 없었다. 이런 황당한! 서울 도심에 이런 곳이 있다니, 혹시 몰래카메라로 장난치는 건 아닐까?

구보씨는 이 무인 동굴도서관을 만든 이가 궁금했다. 빌딩의 오너인 재벌 회장이 얼마 전부터 기업의 사회적 가치를 계속 외치더니 그가 연출한 드라마인가? 참모들이 도둑질은 어떻게 막느냐며 반대했을 텐데, 고맙습니다, 회장님! 구보씨는 온갖 생각이 교차했다.

옛날부터 구보씨도 늘 이런 책 읽는 동굴 하나 만들고 싶었다. 세상살이에 지친 자들이 일을 끝내고 스며들어 책도 읽고 잠깐 삶에서 도피하는 곳. 그래서 구보씨는 감독 시절 'TV문학관' 만들 때 그 꿈을 드라마 속에 펼쳤다. 출판사 사장인 주인공이 책벌레들을 위해 달동네 아파트 꼭대기 층에 독서동굴 하나를 만든다. 업무에 시달리던 책벌레들은 일을 마치면 등산하듯 달동네로 올라와 책을 읽는다. 아파트 안은 마치 북한산, 청계산처럼 큰 바위와 큰나무를 갖다놓고 등산텐트까지 쳤다. 책벌레들은 주말 산에 올라 독서하듯 바위나 나무에 기대어, 어떤 자는 텐트 안에 배를 깔고 누워서 책을 읽는 도심속 산중도서관! 그런 드라마틱한 공간을 현실에서 발견한 구보씨는 집으로 돌아오며 콧노래를 불렀다. 쾌지나칭칭나네! 얄리얄리 얄랑성 얄라리 얄라!

그 후로 구보씨는 시간 나면 이 동굴도서관을 찾아간다. 꼭 책만 읽는 건 아니다. 반쯤 누워 유튜브로 '조슈아 벨'의 바이올린 연주를 듣기도 하고, 지루하면 스마트폰 댓글을 보기도 한다. 이런 '조슈아 벨'은 찾아보면 있다. 100평이 아니면 어떤가. 동네 5평짜리 카페, 평온과 사색을 주고 삶을 추스르거나 돌아보게 하는 여러 존재들. 여러분은 주변 소중한 것들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스치는 일은 없으신가?

구보씨, 최근 또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
무인 동굴도서관을 만든 이가 재벌회사 회장님이 아니었다. 그냥 이름 모를 장사꾼이었다.
구보, 어제 집에 있는 귀한 책 하나 품고 나와 동굴 속 귀퉁이에 갖다 놓고는 자신의 뺨을 찰싹 때렸다.

이응진 경기대 한국드라마연구소 소장

fnSurvey